우울한 자의 인간정리

by 검질

나의 첫 번째 주치의는 내 상태가 단순히 우울한 모드인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기 때문에 친구와 얘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들은 내 상태를 모르고 우울증이라는 병에 대해서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으니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사람에게 크게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K는 10년 전 내 직장상사였다. 50대 독신 여성인 그녀는 당차보였고, 씩씩하게 느껴졌다. 직장을 떠난 초반에는 1년에 한 번 정도 그녀를 만나기도 했었다. 그 후, 만남이 뜸해진 다음에는 전화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그녀와의 만남이 약 5년간 없었고 그동안 나는 우울증 진단을 받으며 치료를 받게 되었다. 만남이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연상인데다가 이해심도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의 상태를 하소연 하기도 했고, 우울한 날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도 내 나이 무렵에 그런 ‘우울’을 겪었다면서 그 나이가 힘든 나이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렇게 1-2년 통화를 주고 받는 사이에 그녀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통화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이 나보다 더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고, 나의 상황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전화하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녀 쪽에서 나의 안부를 묻는다며 전화를 해 놓고선 자신의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일이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일을 쉬어야겠다고 도저히 병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는 얘기를 하자 그녀가 본심을 드러냈다.

“자기, 잘 생각해봐, 자기가 무슨 우울증이야! 무슨 우울증인 사람이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고 자기 일을 할 수가 있어? 우울증, 공황장애는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만 있어, 자기는 지금 아픈 상황이 아니야! 무슨 일을 쉰다고 그래, 그 나이에는 다 힘든거야 !”

하며 나의 가슴을 내리쳤다. 아, 그런 거였구나, 그녀가 보기에는 내가 그냥 힘들어서 하소연 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구나, 그동안 나에게 연락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연락을 한 것이었구나.

간신히 전화를 끊고 가슴을 내리치며 펑펑 울었다. 내가 그동안 버텨왔던 날들이,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왔던 날들이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날들에 불과할 뿐 아니라, 나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구나. ‘내가 어떻게 견디고 있는데, 지가 뭘 안다고 그래!’ 라는 말이 마음속을 휘저었다.

나는 내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낸 그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우울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언의 대상자를 잘못 선택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자책감도 우울 때문에 드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 글을 쓰는 상태에서는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당시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혔던 나는 나를 미워했다. 왜 하필 그녀였을까.........


돌이켜보니 나와 그녀는 5년 정도 만남이 없었다. 전화를 매일 한 것도 아니고 한 두 달에 한 번 정도 연락하는 사이였다. 사람에게 자주 연락하는 편이 아닌 나에게는 그 정도도 많이 연락하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관계를 오해했었다. 그녀는 실제로 나의 우울을 눈으로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다. 우울한 날 내 곁을 지켜준 적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나의 우울을 이해한다고 착각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우울할 땐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곁에 누가 있는 것이 싫고 부담스럽다. 나의 경우는 많은 사람을 대하기를 싫어하고 의지하는 한 두명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관계가 지속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고, 사람 보는 시야가 좁아졌다.

시간이 지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쓸 정도로 상처가 아물고 보니, 나의 우울로 인해 사람 보는 또 다른 기준이 생겼다. 사람의 본성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람을 걸러서 만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좋은 일이 있을 때 곁에 있는 친구보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같이 있어 주고 남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다.


우울로 인해 이렇게 인간관계를 재정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떠날 사람, 나와 결이 안 맞는 사람은 떠날 것이다. 이제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더욱 감사하고 이들과의 소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과거의 인연에 휘둘리지 말고 현재의 인연을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나를 위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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