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과 영화 『지슬』 2
『지슬』의 배경은 바로 Ⅰ부에서 바라본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주도에 무장혁명이 일어난 줄 알고, 육지에서 경찰과 토벌대가 파견된 것이다.
민간인을 폭도로 모는 포고령
토벌하러 온 9연대의 송요찬(내각수반, 인천제철 사장, 국정자문위원을 지낸 3,5공의 대표적인 인물) 연대장은 1948년 10월 17일에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곳을 통행금지 지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을 드나들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내용의 포고령을 내린다. 산간 지역 마을을 초토화할 수 있는, 그리고 양민을 학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포고령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슬』의 배경이 된 동광리 마을 사람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고령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피난을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동광리 사람들은 1948년 11월 14일에 발생한 ‘무등이왓 학살 사건’을 계기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큰넓궤로 도망쳤다고 한다. 큰넓궤는 동광리 마을 사람들에게 ‘일제 때도 미군 폭격기들이 상공에 돌아다닐 때도 안전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모름이란 희망
큰넓궤는 입구가 작지만, 그 안으로 들어서면 꽤 넓은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온 마을사람들이 입구에서 가까운 통로 쪽에 자리 잡고, 나중에 온 마을의 사람들은 안 쪽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40일이 넘도록 머물러야 했다. 이곳 생존자인 신원숙씨는 “40일 동안 한 번도 밖에 못 나갔어. 어른들은 망을 보거나 밥을 지으러 나갔다 오곤 했는데 어린애들은 밖에 못 나갔지. 동굴 안에 있으면 언제가 낮이고 밤인지도 몰라. 얼마나 하늘이 보고 싶고 바람이 쐬고 싶던지.”라고 회고했다. 동굴 안에 있으면 공기가 잘 통하는 것도,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답답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런 날이 언제 끝날 거라는 희망조차 없었다. 어찌 보면 김진숙씨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을 머물렀지만 처음에 309일을 머물게 될 거라는 걸 알지 못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처럼, 동굴에서 40일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몰랐기에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때론 예측할 수 없다는 게 희망을 주기도 한다.
최고의 은신처 & 최적의 사형터
동굴엔 이중적인 성격이 함께 있다. 토벌대는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겐 최고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위치가 노출되면 ‘최고의 은신처’는 ‘최적의 사형터’로 순식간에 바뀌게 된다. 입구에서 집단 발포를 하거나, 폭탄을 던질 경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에선 후반부에 위치가 발각되고 만다. 토벌대에 붙잡힌 사람에게 동굴 위치를 알려주면 살려주겠다고 회유를 하여 동굴 위치를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큰넓궤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질 만도 한데, 그러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한다. 집에서 가져온 잡동사니를 모두 태워 매연을 입구 쪽으로 피워 토벌대가 동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매연이 입구 쪽으로만 나가는 건 아니었다. 동굴 내부에도 쫙 퍼지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매연을 마실 각오를 하며 연기를 피운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마당에 매연쯤은 별 게 아니었을 것이다. 토벌대는 몇 번 진입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집단 발포 후에 입구를 봉쇄하고 떠난다.
정방폭포엔 눈물이 흐른다
큰넓궤에서 생활한 마을주민 120여명 중 상당수는 동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죽었고, 그 중 대다수는 볼레오름으로, 나머지는 미오름으로 갔단다. 당연히 볼레오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왔기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 발자국을 따라 토벌대가 들이닥쳐 동광리 주민들은 잡히고 만다. 그 후 1월 22일에 정방폭포 부근에서 총살당한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쫓고 쫓기는 살육전이 계속된 것이다. 다음은 『한겨레신문』기사를 발췌한 것이다.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86명 가운데 동광리 주민은 40명으로 알려졌다. 바다와 이어진 정방폭포에서 사람들의 시체가 파도 너머로 떠밀려갔다. 유족들은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했고, ‘헛묘’를 동광리 마을 곳곳에 만들었다. 헛묘는 시체를 묻지 않은 묘라는 의미다.
-『한겨레신문』, 2013.3.30., 13p
이런 사실을 알고도 정방폭포에 가서 과연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올 수 있을까? 위령제를 지내지는 못할망정, 이젠 차마 사진을 찍으며 희희덕 거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정방폭포에서 한기 때문에 채 3분을 버티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건 그곳에서 죽어간 뭇 원혼들의 억울함이 만든 게 아닐까.
4.3은 현재진행형
이런 살육전을 견뎌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나서 산에서 내려왔지만, 수용소에 갇혀야 했다. 그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사상검증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적으로 검증만 된다면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연좌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고한 양민들이었을 뿐이지만, 국가에 ‘빨갱이’로 낙인이 찍혔고 그들의 가족까지 연좌제의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니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었으며, 그저 사는 듯 마는 듯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 4.3 진상보고서」엔 “제주도 경찰, 행정당국이 5만여명의 4.3사건 관련자 가족 명단을 별도로 관리하며 각종 신원조회의 근거자료로 활용했다”고 적혀 있다.
4.3항쟁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채 지금까지 흘러왔다. 그런데도 국가권력 기관장들은 4.3항쟁의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 적도 없었다. 억울하고 비통하지만 감내하며 시간을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떤 대통령도 4.3항쟁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4.3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2006년에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위령제에 참석하여 애통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음과 같은 말로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저는 먼저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랜 세월 말로 다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여러분께 사과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최고통수권자의 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제주도민의 한 맺힌 마음을 위로했을지 느낄 수 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죽어도 여한이 없을 그런 말을 공식석상에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통령의 사과문 발표 이후 7년이 지났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 다음 대통령은 위령제에 찾아오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공식적인 발언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목차
47년 3월의 이야기
잘못된 수습은 오히려 불씨를 남기고
48년 4월의 이야기
민간인을 폭도로 모는 포고령
모름이란 희망
최고의 은신처 & 최적의 사형터
정방폭포엔 눈물이 흐른다
4.3은 현재진행형
영화로 제사를 지내다
연출이 살린 영화
자막이 필요한 국산영화
정길이란 인물에 집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