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Feb 01. 2017

욕심이 낳은 풍경

2009년 국토종단 24 -  4월 29일(수)

연기군은 정부청사 공사로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다. 예전의 도시건설은 자연을 적게 훼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굽이치는 강이 있으면 강을 따라 굽도록, 언덕이 있으면 언덕을 따라 오르내리도록 길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구 전라선은 섬진강을 따라, 구 경춘선은 북한강을 따라 건설되어, 그만큼 이동시간은 길어지되 자연의 풍광을 만끽하며 갈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현대의 도시건설은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여 진행된다. 도로는 직선화되고, 언덕이 있으면 터널을 뚫어 최단거리가 되도록 한다. 바로 이곳도 그런 현대의 건설방식이 그대로 적용되어 온 토지를 모두 깎아내어 온갖 생명체의 비명이 가득한 곳이 되고 말았다. 난 그저 잠잘 곳을 찾아 스쳐지나가는 데도 여러 생각이 들더라.         


▲ 이 전날에도 민가에서 자며 여행의 묘미를 만끽했는데, 과연 이 날은 어떨까?



       

욕심이 맘을 흔들다 – 처음 허락받은 교회에 만족 못하다

     

어느덧 5시가 넘었기에 무작정 걸었다. 외곽을 빠져 나가야 그나마 멀쩡한 마을이 보일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 탓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 희미하게 마을이 보인다. 마을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논을 가로질러 가야했다. 들판에서 부는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마을로 걸어간다. 거긴 연기군 남면으로 꽤 규모가 있는 마을로 보였다. 그래서 최대한 가까이 가보니 교회가 3군데나 있어서 한숨 놨다. 그 중에 제일 작은 교회로 들어가서 목사님께 잘 수 있는지를 물어보니, 자도 된다고 하시더라. 이로써 오늘의 여행은 순식간에 잘 마무리 되는 ‘듯했다’.

그런데 쉽사리 짐을 풀지 못했고 마을을 한 바퀴 다시 돌고나서야 비로소 잘 수 있었다. 과연 어떤 일이 생겼던 걸까?



▲ 저기 산 밑이 연기군 남면이고 마을이 보인다. 설마 저곳도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겠지.



큰 길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갈라지는데 왼쪽 마을에 한 교회가, 오른쪽 마을에 두 교회가 있다. 이런 상황이니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두 교회 모두 왼쪽 교회에 비하면 규모가 있다. 두 교회 중에 아무래도 좀 더 작은 교회가 끌리더라. 아무래도 예전에 작은 교회를 다녀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사택에서 목사님께 허락을 맡으려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물으시더라. 

“이불은 가지고 다니세요? -목사님”, “아니요~ 배낭엔 옷과 책밖에 없어요 -건빵”, “저녁은 먹었어요? -목사님”, “부랴부랴 오느라 먹지 못했어요 -건빵”

오늘은 아침을 먹은 이후로 줄곧 굶었다. 중장초 아이들이 준 간식으로 간단히 요기했을 뿐이다. 사택에 허락을 맡으러 갔을 때 목사님은 식사 중이었다. 그러니 같이 먹자고 하시는 건 아닐까 은근히 기대할 수밖에~ 배가 고프고 몸이 고달프니 염치․코치는 죽 쒀먹은 지 오래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시긴 커녕 이곳엔 식당이 없다며 슈퍼마켓 위치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닌가? 기대를 했던 탓인지, 굶은 탓인지 실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목사님은 예배당에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예배당은 고풍스런 분위기였다. 예전에 지어진 건물답게 마룻바닥이 인상적이었고 오래된 나무 의자도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예배당에 짐을 풀고 여행기를 정리하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지도에 표시했고 순간순간 들었던 감상을 정리했다. 한참을 정리하고 있는데 목사님은 오시지 않더라. 

교회 안은 썰렁했고 어둑침침했다. 그곳에 덩그러니 혼자 있으려니 불연 듯 암담하다는 생각과 함께 쓸쓸함이 몰려오더라. 그 순간 ‘차라리 딴 교회에 갈 걸 그랬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점차 커져가더라. 그러다 급기야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럴 땐 맘을 먹기보다 행동은 훨씬 빠른 느낌이다. 

교회 문을 조심하게 열고 고양이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배신하는 것만 같은 찝찝함을 느끼면서, 혹 뒤에서 목사님이 ‘어디 가세요?’라고 부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 말이다.                



▲ 이젠 다음 지도에서나 볼 수 있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이곳을 나와 난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욕심이 맘을 흔들다 – 두 번째 교회에선 불청객 취급을 당하다

     

곧바로 위쪽에 있는 교회에 갔다. 그 교회는 7시밖에 안 됐는데도 이미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 조용히 들어가 뒷좌석에 앉아 조용히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께 상황을 말했다. 거기엔 교회란 사람을 품어주는 곳이기 때문에 매몰차게 쫓아내진 않을 거란 생각이 있었기에 편하게 얘기했다. 

그런데 언제나 상황은 변화무쌍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목사님뿐 아니라 성도님까지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지역도 공사구간에 포함되기에 교회는 임시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거라며, 잘 곳이 없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난 골방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안 되겠냐고 사정을 해봤지만, 매우 완강했다. 

헐!! 설마 했던 일이 이렇게 진짜로 일어날 줄이야. ‘설마 교회에서 사람을 내치기야 하겠어’라고 안도했었는데, 보란 듯이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어떤 분은 “근처에 한 시간 정도 더 걸어가면 다른 교회도 있어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더라. 이미 8시가 넘었는데 그러면 이 어둠을 뚫고 다시 1시간을 가야 한다는 말인데, 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실 줄이야. 그 분은 그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얻은’ 셈이다. 

어찌나 기분이 상하던지 ‘썩소’를 머금고 교회를 나왔다. 그런 상황을 겪고 보니 그제야 처음에 허락해준 목사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겠더라.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이다.                



▲ 그래서 발걸음을 옮긴 교회가 여기다. 규모가 훨씬 크지만, 강고하게 안 된다고 하더라.




욕심이 맘을 흔들다 – 살기 위해 안면몰수하고 첫 번째 교회로 다시 가다

     

과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두 가지 선택 사항이 있었다. 1시간 더 걸어 다른 교회에 가는 것과 안면몰수하고 아까 그 교회로 가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를 찾아가도 상황이 좋을 것이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아까 그 교회로 갔다. 내 얼굴에 철판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 나도 살아야 하니 이리도 뻔뻔해 진다. 

양화 감리 교회도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 설교 중에 예배당에 들어가니,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신다. 그 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야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예배가 다 끝나고 광고 시간에 내가 머물게 되었단 얘길 하시더라. 그러면서 “어디 갔다 왔어요?”라고 물으신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재빨리 머리를 굴려 “식당이 있나 찾으러 한참을 가다가 없어서 슈퍼에서 빵을 사 먹고 왔어요.”라고 거짓말을 했다. 정직하게 말하기엔 너무도 쪽이 팔렸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나고 성도님들이 다 떠난 후에 목사님과 여행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교사가 되는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과 세상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걸어서 여행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목사님도 흥미진진하게 들으셨고 내일 가야할 길을 지도를 보며 설명도 해주시기까지 했다. 

금방 전엔 교회에서 거부를 당하며 암담함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안락함을 느끼고 있다. 내가 자초한 환경 변화지만 그 덕에 목사님의 호의도, 예배당의 고적함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나름 괜찮은 경험이라고 할 만 하다.                



▲ 누군 욕심을 내라고 말한다. 그래야 발전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욕심은 더 많이 일을 그르친다.




거리의 인연 – 양화감리교회 목사님과 사모님

     

목사님은 저녁을 집에서 차리고 있으니 거기서 먹고 잠은 예배당에서 자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밥이 차려질 때까지 기다렸다. 근데 예배가 끝난 후에 이야기를 하며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게 아니면 예배당이 잘만한 곳은 아니라 생각해서인지 갑자기 사택의 아들 방에서 자라고 하신 거다. 아까 나름 ‘배신’을 했던 탓에 이런 극진한 대우까지 받으니 엄청 죄스럽게 느껴지더라. 

곧바로 짐을 모두 들고 사택으로 건너갔다. 들어가선 아들에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으며, 사모님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깨끗이 씻고 밥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어찌나 맛있는 것을 많이 차려놓으셨던지 그걸 보고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더라. 

그런데 그때 사모님이 자꾸 “아까 전에 옆에 있는 교회에 가신 건 아니죠?”라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시는 거다. 어찌나 찔리던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역시나 아까 예배가 끝난 후에 했던 변명대로 그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그 시간도 잘 넘어갔고 어느새 사모님이랑 친해져서 농담 따먹기까지 하게 되었다면 믿을까나. 내가 이래 뵈도 인상이 꽤 좋고 사람이 믿음직하게 생긴 편이다(이거 웬 ‘자뻑’인가요??). 여행을 시작한지 10일이 지나가다 보니, 여행다운 여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느끼며 사람을 알아가는 재미를 흠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참 재밌다.                



▲ 교회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빈공간이 되었고 그 옆엔 정부청사가 들어서면서 개발되고 있는 중이다.




거리의 인연 – 다른 정치색다른 현실인식

     

아 참! 오늘은 재보궐 선거일이다. 저녁을 먹고 나선 티비를 보고 계신 목사님 곁에 가서 앉았다. 개표 결과가 화면 하단에 나오고 있다. 그걸 통해 자연스럽게 목사님의 정치의식을 알 수 있었다. 

목사님은 동아일보를 보시고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MB를 찍으셨다. 정치색이 다분히 보수적임을 알 수 있다. 노무현에 대한 증오도 많으셨다. 우선 연기군을 공사판이 되게 만들어 정든 곳을 떠나게 했으니 그런 상황에 더욱 분노가 치민 것이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냥 툭 튀어나오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때 티비에선 전북에서의 개표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역시 정동영 & 신건이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고 있었다. 난 그게 맘에 들지 않았다. 한 지역의 민심이 한 곳으로 쏠려 있다는 건 어찌되었든 ‘지역주의’란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북에선 ‘박근혜’란 이름만으로도 표가 몰린다. 그래서 ‘친박연대’라는 웃지 못할 당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전북도 ‘오십보백보’였던 거다. 여기서도 ‘정동영’과의 친분만 밝히면 그 사람이 어떻든 뽑아준다. 정책은 사라지고 인물만, 당명만 난무하는 선거판이 된 것이다. 그러니 더욱 투표가 하기 싫을 수밖에 없다. 



▲ 정동영씨는 17대 대선에 나왔었다. 그런데 다시 지역구로 내려와 보궐선거전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엄청 실망스러웠다.



목사님은 전라도의 민주당 지지를 외부인이 섞이지 않은 폐쇄성 때문이라 진단하셨다. 다른 도(경상도도 포함)는 외부인이 섞인 탓에 각 당의 표가 어느 정도씩은 나오는데 전라도는 자기들만 있는 탓에 민주당 몰표가 가능하다는 분석이었다. 

정말 그런지는 논란이 있겠지만, 그건 너무 좁은 식견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런 지역주의를 이용해 먹는 것은 ‘정치꾼’들이었으니 말이다. DJ와 YS가 결별하면서 더욱 고착화된 지역색을 띤 정치 풍토의 개선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시급한 정치 과제가 아닐까 싶다. 이런 풍토가 계속 되는 한 투표란 하나의 허례허식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흉내 낸 ‘반민주주의’라고나 할까. 

단순히 말해서 난 전라도에서 한나라당이 당선되거나 TK에서 민주당이 당선된다면 그게 정치가 선진화된 것이라 평가하련다. 거기서 더 나가 강남에서 진보 정당이 당선된다면 그건 일대 혁명일 테지. 그나마 개표결과를 보면서 기분이 좋았던 건 울산 북구에서 진보당 후보가 앞서고 있어서였다. 그 곳은 노동자들이 많은 곳이니 지역색보다는 정책 대결이 더 우선시 되었을 것이다. 

정치는 우리나라에선 지역별로 민감한 사안이다. 그래서 난 내 정치색을 드러내진 않고 목사님 말에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충청도 사나이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물론 확대해석해서도 안 되고 조금 아는 걸 전체로 부풀려서도 안 된다. 하지만 같은 백제문화권인 충청도와 전라도의 벽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공주 경천리 어머니께서 주심 +10.000원 / 총합 +10.000)



▲ 그나마 울산에서 조승수씨가 당선된 건 하나의 사건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광기의 언덕’ 연기군에 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