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카자흐스탄으로 떠나는 전날이다. 어젠 자면서 수능 보러 갈 때, 군대에 갈 때의 분위기를 느꼈다. 그건 ‘여기서의 이 밤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이 불안하다기보다 처음 하는 일에 대한 걱정이 그렇게 느껴지게 만든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게 나에겐 아직도 힘든 일이다.
오늘 교사회의 시간엔 카작여행의 일정 논의와 초이쌤의 연극팀 여행기 중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연습 시간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느라 자신이 하는 역할 외에 상대방의 역할, 극의 흐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얼핏 보면 스마트폰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지적한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다른 데에 있었다. “휴대폰을 하지 않아도 다른 친구의 연습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13.06.12)”라는 준규쌤의 글에 핵심이 있는 것이다.
준규쌤은 협업을 해야 하는 연극이란 장르를 소화하면서도 자신만 생각하는 학생들의 의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나만 잘하면 된다’가 사회적인 담론이 되고 ‘엘리트 1명이 99명을 먹여 살린다’는 극단적인 엘리트주의가 만연하면서 개인화, 파편화된 현실이니 말이다. 이런 현실이기에 스마트폰을 못하게 해도,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다른 사람과의 호흡에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의 핵심은 바로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린 개인들을 어떻게 공동체 중심으로, 타인에 대해 관심 갖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건 아파할 줄 아는 마음, 즉 공감의 문제이다. 그런 인간으로 성장시킬 수만 있다면, 공부는 부차적인 게 되고 만다.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곳에 가던지 환영받으며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감을 맹자는 인간의 타고난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사단론四端論의 핵심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인데, 왜 그게 타고난 마음일 수밖에 없는지 논증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지금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면, 두려워하고 측은해하는 마음이 생긴다.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분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며, 마을 친구들의 칭찬을 받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니며, 어린아이의 괴로워하는 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맹자』 「공손추」 상 8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孟子』 「公孫丑」 上 8
맹자가 증명하는 방법은 명쾌하다. 사람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무의식중에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건 의식이 미치기도 전에 그런 것이기에 선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며, ‘인仁’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증의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나 소위 양심이라 하는 ‘마음의 거리낌’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하철에 돌아다니는 장애인이나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성금을 내서 돕거나, 그렇지 못할 땐 마음 짠해 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타고났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개인을 처절할 정도로 짓밟아 만신창이로 만들거나 타인을 짓밟고 성공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곧 맹자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반증은 아닌가?
맹자가 활동했던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로 힘을 가진 이가 사람을 죽이고 땅을 뺏는 일이 당연시 되었다. 그만큼 약육강식이 판을 치던 시대에 맹자는 도도하게 “힘으로 힘을 제압하는 것은 패도覇道요, 인한 마음으로 힘을 제압하는 것은 왕도王道다(「공손추」 상 3).”라며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고 유세하며 살았던 것이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가 봐도 맹자의 말은 반미치광이의 말에 다름 아닌데,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맹자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런 비정상적인 시대일지라도 타고난 마음은 있는데, 육체적인 욕심 때문에 그 마음이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한 마음이 욕망에 가려지면 ‘불인不仁’해진다. 의학서에서 불인을 해석한 대목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의서에선 ‘손과 발이 마비되는 것을 불인하다고 여겼다(以手足痿痹爲不仁)’라고 풀이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불인은 곧 ‘마비’를 뜻한다. 마비는 세상과의 소통을 끊는 것이며 천지자연의 흐름, 타인이 보내는 미묘한 감정을 차단한다는 뜻이다. 불인은 곧 병임에도, 그 때 세상이나 지금 세상은 사람들이 불인해지길 방조하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때론 재미를 위해 시작한 장난이 도가 지나쳐서 한 사람을 집중 공격하여 상처를 주기도 하고, 한 사람을 몰아붙여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일들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만 눈물을 흘리고, 이상한 사람으로 몰린 사람만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얼핏 보면 집중 공격을 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내몬 사람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가해자만 처벌하고 제거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건 미봉책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재발될 뿐만 아니라 더욱 극악한 장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단순화해서 풀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문제는 꼬이기 마련이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봐야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선악의 구분이 아닌, 누구 하나 공감할 마음이 없다는 데 있다. 그건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불인에 따른 마비의 문제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며, 이야기가 통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느끼며 서로 무시하고 문제아 취급을 한다. 상대방을 문제아로 만들어야지만 자신의 정상성과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믿는 것이다. 타인을 적으로 만들어갈수록 자신의 고립감은 더욱 심해지며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만 외부환경과 타인에 대해 더욱 공격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여행의 프롤로그가 무진장 무거워졌고 길어졌다. 그렇기에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하자. 이번 카자흐스탄 여행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여행을 떠나는 건, 본디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할수록 더욱 자세히 자신을 보게 되니 말이다. 한국 사회가 가진 문화의 편협함, 습관처럼 누리던 환경의 고정성 속에 가려진 나의 모습을 낱낱이 살펴보며 어떤 인식이 왜곡되었고 어떤 부분이 마비되었는지 면밀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자흐스탄 여행이 경력 쌓기 정도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인지 그게 이번 여행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