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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05. 2019

집중의 본래면목

2013년 7월 3일(수)

우슈토베에서 마지막 일정이 있는 날이다. 내일은 아침만 먹고 알마티로 떠나기 때문에, 우슈토베에서 오롯이 하루를 보내는 마지막 날인 것이다. 

카자흐스탄 여행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아쉬운 마음 저편에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고 있다.                            




집중이 곧 나다

     

우슈토베에서 이틀 동안 있었지만, 이곳은 한국의 외진 시골 같은 느낌이다. 자본이 미처 이르지 못한, 그래서 과거를 그대로 간직한 곳처럼 느껴졌다. 어제 보았던 밤하늘은 ‘늘 있지만 볼 수 없던 것들’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줬다. 앞만 보고 달려왔거나,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대하며 살아온 사람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놓친다는 건, 어찌 보면 정말 ‘놓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덜 신경 쓴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이 한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집중하지 않는 것들은 잊혀지거나 묻힐 뿐이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는 걸 거다. 하지만 이 담론discuss조차 효율주의가 삼키면서, ‘효율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집중할 것인가?’하는 문제로 변질되었다. 선택과 집중 또한 목적 달성의 수단 정도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봐서는 집중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볼 수 없다. 집중이야말로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신경 쓰고, 무엇이 되려하는지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구에 미친 사람은 칠판을 봐도 당구대가 보이고, 돈에 미친 사람은 갯벌을 보고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상상하며, 스타크래프트에 미친 사람은 개미떼를 보고 저그떼를 떠올린다. 

이런 예는 내가 집중한 것이 어떻게 현실 속의 사물에 빙의되어 드러나는지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난 과연 무엇을 집중하며 살고 있나?’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고, 그걸 단순화하면 ‘집중하는 것=나 자신’이라는 거친 등식도 만들 수 있다. 나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지금 내가 집중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면 된다. 그 속에 이상적으로 치장되지 않은 현재의 내가 숨어있고, 그걸 발견할 때 비로소 나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 갯벌 자체의 가치보다 이곳을 개발하면 어떤 가치가 있는지만을 보려 한다.




무자아 ⇒ 무아

     

나는 과연 이 여행 동안 무엇을 집중하며 보냈던가? 그저 일정을 소화하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주어진 일들을 실수 없이 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무엇에 집중하는지조차 모르며 지내왔던 것은 아닐까. 밤하늘에 수없이 떠있는 별들은 등한시한 채,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며 헛된 희망만 쫓으며 산 것은 아닐까. 

돌아보면 난 거의 집중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내왔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집중하는 것=나 자신’이라는 등식으로 지금의 나를 보면 ‘집중하지 않음=무자아’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무아無我’는 불교용어로 끊임없이 ‘나 자신’이길 바라는 사회가 규정한 것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체적인 결단이라면, ‘무자아無自我’는 무미건조하게 사회가 정해놓은 틀대로 맞춰서 살아가고자 하는 맹목적 의지(쇼펜하우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아에 이른 사람은 내가 없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있고, 무자아에 이른 사람은 내가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무아에 이른 사람은 나를 서서히 지워내는 방식으로 세상과 타인을 창조해나가지만, 무자아에 이른 사람은 나를 고집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타인을 파괴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집중하지 않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는 건, 생각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죄가 될 수 있다(한나 아렌트). 어제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면서,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얼마나 고루하게 살아왔으며, 있는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없는 것만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하나의 계기이고 하나의 단초이다. 이 계기를 통해 이젠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나’를 찾아갈 것이고, 그렇게 내가 누구인지 알아갈 것이다. 



▲ 아침을 푸짐하게 먹고 마지막 일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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