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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21. 2019

우치다 타츠루와 무라카미 하루키와 임마누엘 칸트의 공통

공생의 필살기7

우치다 타츠루, 무라카미 하루키, 임마누엘 칸트, 이렇게 세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재밌는 점은 그 공통점이 그들에게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 공통점이란 과연 무엇일까?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그 공통점이란 세 사람 모두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 4시에 일어나 12시까지 글을 쓰고 12시엔 음악을 듣거나 조깅을 한 후에 다시 글을 쓴 후에 10시가 되면 잠을 잔다고 한다. 우치다쌤은 5시 30분에 일어나 합기도를 하고 오전활동을 시작한단다. 칸트는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산책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가 걸어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세 사람 모두 얼마나 규칙적으로 살아왔는지 이런 이야기를 통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땐 ‘강박증이 있지 않고서야 저렇게 판에 박힌 듯한 생활을 해야 하나?’라는 반감이 들어 절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플랜맨』이란 영화를 보아도 반복적인 생활은 변화를 싫어하는 심리상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얘기를 들은 관중들도 우치다쌤의 말에 ‘대단하다’고 반응하기보다는 ‘너무 평범한 얘기여서 진이 빠지는데’라거나 ‘그거 병 아니야?’라거나 하는 등의 황당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 우치다쌤의 얘기를 들으니 [플랜맨]이 스쳤다. 그리고 주류심리학이 만든 사회적인 풍경이 스쳤다.

         



반복적일 때 조그만 변화에 민감해진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생각에 우치다쌤은 “다른 조건을 모두 똑같이 만들어야 조그만 변화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이 자주 바뀌면 자기 몸의 작은 변화를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변화도 눈치 채지 못하게 됩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로, 똑같은 행위를 해야 작은 변화도 바로 알게 됩니다. 특히 계절의 변화, 같은 시간대의 어둡고 환한 정도, 몸 속 기의 흐름, 봉우리의 변화 등과 같은 것은 모든 조건을 똑같이 만들 때에만 비로소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로 생각의 전환을 유도한다. 

세 사람의 규칙적이며 절제된 삶은 변화에 대한 불안 때문이 아니라,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즉 불안을 해소하려 변화를 통제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변화에 민감해지기 위한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형태의 변화   

  

그러면서 우치다쌤은 “보통 변화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있어야 할 게 없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없어야 할 게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로 변화의 두 가지 패턴을 이야기해줬다. 둘 중에 어떤 변화가 더 감지하기 어려울까? 없었던 게 생겼다면 의식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하지만 있었던 게 없어지는 경우는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있었던 것이 없어졌다’라는 것은 ‘평상시에 얼마나 주위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살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늘 지나다니던 초등학교 앞엔 목련이 피는데 평소에 거의 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지나간다. 그런 식이다보니 목련나무가 그 학교에 심어져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선배에게 “너희 집 앞 초등학교에 목련 봉우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더라”라는 문자를 받고 깜짝 놀랐다. 있다는 것은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 만약 그게 사라진다 해도 ‘없어졌다’는 것을 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변화에 완전히 둔감하다 못해, 관심조차 없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쯤 되니 우치다쌤이 말하는 규칙적인 생활의 힘을 짐작할 수 있겠더라. 규칙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보면 주위의 것들에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며 어떤 것들이 있는지 관찰력이 길러지고 몸에 어떠한 반응이 일어나는지 민감해지게 된다. 하지만 나처럼 생활이 들쭉날쭉한 경우엔 목표만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할 뿐 과정은 쉽사리 망각하게 마련이어서 주위의 수많은 것들을 놓치게 되고 어떠한 것들과도 감응한 채 몸을 함부로 다루게 된다. 

어찌 보면 나와 우치다쌤은 같은 24시간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론 우치다쌤이 24시간을 오롯이 보내는 반면, 난 10시간도 채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양적인 시간은 분명히 같지만 질적인 시간에서 확연하게 갈라지기 때문이다. 



▲ 사진작가 리처드 실버(Richard Silver)가 24시간을 사진 한 장에 담았다. 변화가 뚜렷이 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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