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하이쿠 <80>

2020년 3월 9일

by 허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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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있단 걸

다시 알게 되었네

젖은 흙 위로




저에게 처음 맞닥뜨린 죽음은 1999년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동갑내기 친구, 가장 마음이 잘 통하던 형, 외할머니.. 여러 이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빈소를 빠져나올 때마다 나에게도 언젠가 끝이 찾아오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보았음에도 여전히 죽음은 나에게서만은 멀리 있는 듯이 느껴지는 건 무엇 때문일 런지요.

가끔 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꿈에서 신을 만나 인간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 / 그리곤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는 것" (작자미상,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중 '신과의 인터뷰')

이틀 전 저와도 인연이 있었던 이웃의 반려견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함께 자리를 지키며 죽음을 지켜보았던 옛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순간은 나에게도 찾아온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이틀 전에 내렸던 그 비처럼, 하염없이 흙을 적시며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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