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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화건 Jun 27. 2023

오르막 오르기

H.N. 소. 우. 주. 지기의 생각을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하나

어려서부터 바다가 좋았습니다. 이유 없이 그냥 좋더라고요. 바닷가에 산 것도 아니고 자주 다니지도 않았는데  마음속에 바다가 있었죠. 전공도 바다 공부로 정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이 가시죠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산에는 관심이 없었죠. 물에 대한 선호가 워낙 높다 보니 산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산다고 해서 불편함도 전혀 느끼지 않았거든요

가끔 친구들이 산에 가자 하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거절을 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물어보지도 않더군요. 어느 날 한 친구가 "산에 가는 걸 왜 그렇게 싫어하냐?"라고 물어보기에 "옛날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네. '知者樂水 仁者樂山(지자요수 인자요산)' 내가 지혜만 있는 사람이라 물만 좋아하나 보네"라 답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처구니없었겠다 싶네요

아무튼 어릴 적에 산에 간 기억이 정말 없더라고요. 비슷한 경험이라면 '거북이 걷기 대회'로 기억되는 행사에 아버지께서 데려가주신 적이 있었는데, 평이한 트래킹 코스를 열심히 걸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다 군생활을 시작하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죠. 산속에서 경비를 서는 부대에 배치받게 되었는데, 그렇게 싫어하던 산을 매일 오르내리며 지내게 됐죠. 군에는 주특기라는 게 있는데 제가 전공하는 쪽으로 지원했으면 물가에서 생활을 했을 텐데... 학교 선후배들을 군에서 까지 만나는 게 내키지 않아서 한 선택의 결과였죠

처음에는 좋고 싫고를 따질 겨를도 없이 아침·점심·저녁으로 근무계획에 따라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고도가 아주 높거나 험준하지는 않았지만,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어서 출발과 동시에 전력 질주해서 가야 하다 보니 많이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것마저도 적응이 되더군요. 물론 제가 선임이 되었을 때는 뛰어다니는 일은 만들지 않았지만요. 제가 싫어했던 걸 남에게 시킬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아서요

아무튼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산을 오르내리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산 오르내리는 것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네' 그렇게 몸이 산에 적응이 될 즈음 제대를 시켜주더군요. 제대 전에는 '이제 산에도 다녀봐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제대를 하고 나니 딱히 갈 일이 생기지도 않았고, 굳이 만들지도 않았죠


이후 시간이 지나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시 산을 만나게 되더군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사회 초년병으로 회사에 입사를 했을 때는 왜들 그리 산에 데리고 갔는지. 몇 개 회사에 입사를 하여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는데... 과정 중에 무조건 산악훈련이 잡혀 있더군요. 그중 특히 한 회사에서의 교육은 산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었죠. 진행 측에서 종일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야"를 외쳤고, 번번이 속으면서 마음속으로 '뭐야. 장난쳐'를 외치다 보니 몸과 마음이 더 빨리 지치데 되더군요. 결국 그 '조금'은 그냥 달래기 위한 사탕발림임을 알게 되었고, 그 산행은 다시 생각하기 끔찍이도 싫은 기억이 되었죠

아무튼 여차저차하다 한 회사에 정착하게 되었고, 다시금 산과도 관계없는 삶을 살아갔죠

아참. 중간에 아는 분이 여자분을 소개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흔히 '소개팅'이라는 걸 한 거죠. 조그만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분이셨는데... 아 글쎄 취미가 등산이라 하더군요. 틈만 나면 지리산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는데... 두 번째 만남은 북한산에서 하자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일반 등산로로 오른다 생각하고 운동화를 신고 갔습니다. 그런데 왠 걸요. 상대분 준비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그러더니 생각지도 않은 코스로 안내하며 "괜찮으시죠"하기에 별생각 없이 "그럼요"라 답했죠. 속으로 '군대도 다녀왔는데 이 정도쯤이야'하고 경쾌하게 발걸음을 뗐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한 산행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가 하나 생기더군요. '나는 오늘 반드시 살아서 하산한다'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정말 혼자 생쑈를 했습니다. 다행히 다치지 않고 산행을 마칠 수 있었고, 그 분과의 인연도 그렇게 정리가 되었죠

그리고 또 한동안 산과는 인연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요


20세기 끝자락에 IMF를 겪으며 힘들어했던 시기를 살았을 때였죠. 제가 다니던 곳도 힘들었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다행히 큰 어려움이 없이 지냈기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네요. 다만 회사생활의 꽃인 "진급"을 1년간 유예하는 걸로 고통에 동참을 했더랬지요. 물론 저에게는 영향이 없었지만요. 1년 인사적체였음에도 정상적으로 진급을 할 수 있었으니 운이 정말 좋았죠.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버렸지 뭡니까. 당사자인 저 자신은 사전에 어떤 언질을 받지도 못했고, 전혀 낌새도 알아챌 수 없었던 부서 이동을 당해버렸습니다. 얼떨떨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죠. 그런데 저를 진짜 당황하게 만든 건 그때까지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기업 내 교육부서로 이동해야 했다는 겁니다. 정말 황당하더군요

월급을 받는 입장이기에 고민보다는 서둘러 업무 인수인계를 마치고 새 부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모든 게 낯설더군요. 이전 근무지와 환경이 너무 다르다 보니 적응이 쉽지 않았죠. 주변에서는 축하한다고들 하는데, 막상 저 자신은 좋은 걸 모르겠더라고요. 모두 바쁜데 혼자 서류를 보며 업무 파악을 하는 게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하더군요. 그러다 첫 출장 계획이 잡혔습니다. 답답한 사무실을 잠시나마 떠난다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는데...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출장 장소를 듣는 순간 할 말을 잃었으니까요

출장지가 바로 다름 아닌 '설악산'이었거든요. TV에서나 보던 그곳을 제 발로 직접 올라야 한다니... 실소가 나오더라고요. 기가 막혔지만 정신 차리고 급하게 산행 준비를 했습니다. 복장과 장비는 어렵지 않게 준비를 마쳤지만 마음의 준비는 그렇게 쉽지가 않더군요. 그렇게 떠난 업무상 첫 산행은... 아쉽게도 다리 부상으로 엄청난 고생 끝에 마무리되었죠. 중요한 건 부상이 있었음에도 오색에서 출발해 대청봉을 거쳐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완주는 했다는 겁니다. 다만 엄청 힘들었을 뿐이죠

엄청나게 힘든 산행을 했는데도 이번에는 제 자신의 반응이 다르더라고요. 신기했습니다. 싫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전에 "다음에는 진짜 제대로 해낼 거야. 반드시" 생각이 바뀌니 반응이 바뀌더군요

이후 업무상이든 개인적이든 간에 산에 오르는 횟수가 많이 늘게 되었습니다. 거부감이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찾게 되더군요. 제 삶에 또 하나의 괜찮은 일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만족도가 높아졌죠




산에 가게 되면 흔히 '깔딱 고개'라는 걸 만나곤 하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바로 그 구간 '깔딱 고개' 산에 따라서 길이도 난이도도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하죠

'깔딱 고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은... 만만히 봤다가 큰코다쳤던 경험이네요. 역시나 교육부서에서 일할 때였죠. 평소에는 가을이나 겨울에 주로 과정을 진행했는데 불가피하게 한 여름에 움직여야 했던 적이 있었어요. 너무 더운 계절이기에 산행만은 무리라 판단되어 물에서 하는 프로그램도 같이 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해서 선정된 곳이 청평이었고, 인근의 야트막한 산에서 간단하게 산행을 하기로 했죠

솔직히 산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기억은 엄청 강렬해서 지금도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계획을 잡으면서 브리핑을 받을 때는 해발 높이가 낮아서 효과가 별로일까 걱정이 되더군요. 그래도 추천한 사람을 믿고 산행을 진행했죠. 별생각 없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숨이 턱 하고 막히더군요. 시작점부터 정상까지 쉼 없는 오르막이 눈앞에 펼쳐져 있지 뭡니까. 산을 탈만큼 탄 팀원들과의 산행임에도 고생을 엄청 했네요

알지도 못하면서 지레짐작으로 무시했다가 엄청 고생을 하며 참 교육을 받았던 경험이었네요


처음 가는 산에서 겪은 어려움과 쾌감도 있지만, 자주 간 곳에서 경험한 '깔딱 고개'의 버거움도 있었죠

일 년에도 여러 차례 오르던 오대산에서 겪었던 일이죠. 팀에 새로운 직원이 오고 처음 간 산행에서 사달 아닌 사달이 나고 말았죠. 늘 가던 곳이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제대로 큰코다쳤네요. 그 직원이 혹시라도 지칠 걸 대비해서 먼저 올려 보냈었죠.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는데... 그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신입직원이 쉬지도 않고 정상까지 오르는데 티 안 내고 따라가는 게 고역이더군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었죠. '역시 젊음이 좋아. 부러워'

제가 덕분에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된 거죠. '아는 건 편하게 생각해도 된다'는 자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제대로 경험한 일이었네요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지던 '깔딱 고개'도 계속 오르다 보니 요령이 생기더군요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조급증을 내려놓는 거였죠. 얼마나 남았나 궁금하다고 계속 고개를 들다가는 리듬이 흐트러지면서 결국 페이스를 잃게 되니까요. 마음이 급하고 의욕만 앞선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죠. 그만큼 마음을 잘 챙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다음으로는 꾸준하게 한 걸음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였죠. 자신에 맞는 속도로 한 발씩 내딛다 보면 결국에는 목표한 곳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이룰 수 있는 게 생각보다 훨씬 많더군요

마지막으로는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죠. 자신의 한계를 넘어 오버를 하게 되면 지치는 걸 넘어서 사고를 당하기도 하니까요. 자연에서는 자신에 대해 과신해서도 남에게 과시하려고 무리해서도 절대 안 되더라고요. 자기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걸 실감했죠

그렇게 산을 오르며 특히 '깔딱 고개'를 경험하며 왜 '인자요산'인지도 알게 되었네요




사람들이 삶을 길에 빗대기도 하고 산행이나 항해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많이 수긍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 깊이 공감하게 되네요

삶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길과 인생은 많이 닮아있죠. 많은 부침을 경험하며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산행과 비슷한 게 많고요. 한 순간도 정체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항해와 삶 또한 정말 비슷하죠

그러면서 한마디로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되더군요. "자기다움을 지키기 위해 하는 고군분투"


삶을 여전히 오르막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아직 이뤄야 할 게 많이 남아서 그런 거라 생각합니다. 한편으론 "또"하고 한숨도 나오지만 "도전할 게 남아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생각되기도 하네요

오늘도 앞만 보고 무거운 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아냈습니다. 영원히 머물 정상은 없지만 작은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찰나일지언정 쾌감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 행복합니다. 거친 숨을 몰아쉴 정도로 힘을 쏟아야 겨우 한 발을 뗄 수 있을 정도로 힘들지만 또 하루를 살아냄에 만족합니다. 내일 또 내일의 해가 뜨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힘든 일을 겪고 나서 하늘을 쳐다보는 횟수가 많아지네요. 그러다 기록으로 남기게도 되고요. 오늘 하루 눈에 들어온 하늘 중 마음에 드는 게 있어 함께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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