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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화건 Jul 25. 2024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겠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되려 당연하다 받아들일 준비하기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아니면 호르몬의 변화가 있어서 그런지 요즈음에는 사소한 일에도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했을 행동들에도 자꾸 의미 같은 걸 부여하는 걸 보면 분명 변화가 있는 건 부인할 수가 없네요

얼마 전에도 그런 경험을 했죠


겨울이 다 지난 것 같아도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함이 느껴져서 두꺼운 이불을 치우지 못하고 지내다 새 계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던 어느 날이었죠. 이불을 교체하려 했는데 지금까지 쓰던 게 너무 오래되어 새 겨울에는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렵다고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했습니다

떠나보내기로요

나름 꼼꼼하게 작별의 준비를 마치고서 오래되어 정든 이불을 들고 집을 나섰죠. 사회적으로 약속된 곳에서 이별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마치 오랜 지인과 헤어질 때나 느꼈을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이 들어서 내심 당황했습니다. '내가 미쳤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러다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라고 생각을 바꿨죠. 그랬더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받아들여지더라고요. 덕분에 편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설 수 있었네요

그렇게 작은 의식(?)을 치르고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번쩍하고 들더라고요

'이제는 나도 이별을 준비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뜬금없는 생각에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날은 거기까지만 생각키로 했습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눈을 떴죠. 평범한 하루가 주어진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근래 들어 실감하고 있거든요. 평이한 일상에 만족을 하니 삶의 질이 엄청 높아져서 행복감을 느낄 때가 부쩍 늘어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도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꿈도 못 꾸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하루도 만족을 즐기며 지내고 있었죠

오후가 되니 언제나처럼 메일 알람이 뜨더군요. 늘 있는 일이라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잠시 여유가 생겨 언제나처럼 별생각 없이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제 눈을 의심하는 내용에 머릿속이 하얘지더군요. 무언가에 맞은 듯 머리는 띵해졌고, 가슴은 푹하고 꺼지는 느낌이었죠.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닐 거야. 뭔가 착오가 있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곧장 같이 공부했던 동무들에게 연락을 취했죠. 첫 반응은 '무슨 소리야'였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안심했죠. 짧아도 너무 짧은 순간이 지나자 다른 친구들로부터 부고 안내장들이 올라오더군요. 기가 막혔습니다


살면서 저 자신이 모자람을 많이 느낄 때 정신 차리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말문이 막혔죠.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팔순 잔치를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더 그랬습니다. SNS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던 동료의 글을 본 게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부고 안내장을 보내주던 친구들의 반응이 너무 차분해서 이상했습니다. 그때 느꼈죠. 부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란 걸요. 곧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만나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아 우선은 참았습니다


일을 마치고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빈소로 향했습니다. 어둑어둑해지는 길을 달리는데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수많은 감정 중에 특히 후회라는 놈이 가는 내내 마음속을 휘젓고 다녔죠. 인정하기 싫었지만 늘 핑계를 대다가 결국 후회할 상황을 만든 건 저 자신이었기에 타격감이 꽤 크게 느껴졌어요. 복잡한 심정으로 빈소가 있는 장례식장에 도착을 했습니다


시간상으로 늦지는 않았지만, 이미 빈소는 많이 차분한 상태더군요

우선 고인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서 동무들과 생전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리는 시간을 가졌죠. 

편하게 떠나시기를 바라면서요


몇 시간을 빈소에서 머문 후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을 위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분명 몸은 피곤한데 쉬이 잠이 오지 않더군요. 여전히 후회라는 놈이 마음속을 마구잡이로 휘젓고 다니며 저를 힘들게 하고 있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더 힘들었죠. '왜 어리석은 선택들을 해서 제대로 이별을 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며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불쑥불쑥 우울한 마음이 올라와서요. 며칠간 끝 모를 깊은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기분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당연히 부정적 생각들로 머릿속이 꽉 찬 채로 지냈었죠 

그렇다고 맥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여러 시도들을 했죠. 며칠 지나자 조금씩 우울과 충격에서 벗어날 조짐이 보이더군요. 마치 우유통 속에 빠진 개구리가 열심히 허우적댄 덕분에 우유가 치즈로 변하면서 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우화처럼요. 서서히 마음은 평상심을 찾았고, 자연스럽게 생각도 정리되었죠


마음이 편해지니 얼마 전 그날이 떠올랐습니다. 오래된 이불을 정리하며 '이제는 나도 이별을 준비할 때가 된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던 바로 그날이요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해야겠더라고요. 이번 경험이 결심을 굳히는데 확실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솔직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할 수도 있고 길을 잘못 들 수도 있겠지만 우물쭈물 대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 생각되었으니까요

불안도 하지만 설레기도 합니다. 솔직히 제 성향상 불안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지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무조건 한걸음 떼어보려고 합니다

용기를 내기 위해 단전에 힘을 모으고 스스로에게 기합을 넣어봅니다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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