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맞닥뜨렸을 때 당황할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놓이네요
한 달 전이었을 거예요. 어머니께서 TV를 보시다가 '연명 치료 거부'를 신청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예전부터 몇 번이고 말씀하셨던 내용이어서 담담할 줄 알았는데 다시 들으니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이유룰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죠. 그래도 우선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하시죠"라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마음 한편에 자꾸 걸리는 게 있어서 며칠 동안 걱정에 잠겨 지냈습니다. 자료도 찾아보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어머니뿐 아니라 저 역시도 '연명 치료 거부'를 신청하자는 것이었죠. 결정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어머니 거동이 불편하셔서 움직이기 편하신 날로 방문 날짜를 결정해야 했죠. 그렇게 갈 준비를 하다 혹시 해서 보건소에 문의를 하니 기관 사정상 예정했던 날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날짜를 정해야 하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동의서 작성을 위한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연명 치료 거부'를 작성하러 나가는 순간엔 조금 긴장이 되더군요. 그래도 기분이 좋았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보건소로 갔습니다. 휠체어를 사용해야 해서 신경이 쓰였는데 새로 지은 건물이어서인지 깨끗한 데다가 장애인을 위한 주차 공간을 사용하기 편해서 좋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모든 일이 잘 진행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동의서를 작성하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담당자분이 반갑게 맞아주시니 긴장 같은 건 생길 틈이 없었죠. 설명을 듣고 작성하는 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서 잠시 허탈할 정도였어요. 카드를 그 자리에서 받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전산정보원 화재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하여 좀 아쉬웠지만 뭐 어쩌겠어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연명 치료 거부' 카드가 언제 올지 몰랐기에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담당자분 설명과는 달리 생각보다 빨리 '연명 치료 거부'카드가 도착했습니다. 우편물 봉투를 열고 카드를 꺼내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뿌듯했습니다. 마치 칭찬받은 아이처럼요. 다만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같은 기존 신분증에도 함께 표시되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바일 신분증에도 적용이 된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고요. 언젠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그날 밤 조용히 저 자신의 결정을 다시 떠올려 봤습니다. 스스로 기특하더군요. 먼저 가족들에게는 불필요한 고민을 덜어드렸고, 또 지금까지 사회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이번 선택이 그래도 작은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결정이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좋았습니다. 조금 성급한 선택이 아니었나 고민도 했지만 지금은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확신하니까요. 이런 일은 닥쳐서 허겁지겁 결정을 해야 할 사안이 아니잖아요. 미리 준비해 두니 마음이 한결 놓이고 편안하네요
이렇게 또 하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