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 것도, 응원하는 것도 못해.
아스날 팬의 입장으로,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있다. 대한민국 선수가 아스날로 이적하거나 토트넘으로 이적하는 것. 전자는 박주영 선수의 사례 때문에, 후자는 이영표 선수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다. (사실 전자가 압도적인 건 함정.)
현지에 가본 적이 없어서 직접적인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토트넘 선수들은 절대로 빨간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선수나 팬이나 절대적인 라이벌 관계를 일상 속에서까지 유지하며 살아간다. 국내에선 이 정도까진 아니어도 나름대로 아스날팬과 토트넘팬들만 아는 오묘한 적대심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다행이도 내 주변엔 손빠 정도밖에 없다.)
한참 손흥민 선수가 토트넘으로 이적한다는 기사를 접할 때, 아마 태어나서 가장 많은 기도를 했었던 것 같다. 제발 레버쿠젠의 레전드가 되어달라고. 거기서도 충분히 잘하고 있지 않느냐고.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보란 듯이 토트넘은 손흥민 선수에게 7번을 달아줬고 나에겐 혼란을 심어줬다. 정말 솔직한 마음으론 손흥민 선수가 망하길 바랬다. 아니 토트넘이 망하길 바랬다. 그 어떤 식으로든. 최악의 성적을 내주기를, 팀 내 불화가 생기기를, 그래서 손흥민 선수가 한 시즌이라도 빨리 다른 팀으로 이적하기를.
나의 못된 기도를 들었던 걸까. 항상 중하위권에 머물던 토트넘은 포체티노라는 복덩어리를 안고 리그 내에선 보란 듯이 Big 6에 들었고, 챔피언스리그에선 결승까지 가버린다. 손흥민은 2015년부터 현재까지 총 280경기에 출전해 107골을 득점하고 62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당당히 손차박의 자격을 증명해냈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의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가슴 아픈 기록들이다. 왜냐하면 아스날보다 훨씬 잘하고 있는 토트넘이라서. 반비례 그래프처럼 토트넘은 상승했고 아스날은 하락하고 있어서.
해리 캐인을 미워하라면 너무 잘할 수 있는데. 손흥민이라서 그게 잘 안된다. 해리 케인이 골을 넣으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는데, 손흥민이 골을 넣으면 왜 흐뭇해지는 걸까. 아스날 팬이 이래도 되는 건가. 대한민국 선수라서 온갖 스포츠 관련 매체에서 도배가 되는 탓에 꽤나 자주 혼란스럽다. 잘하고 있어서 좋은데 좋아하면 안 될 거 같아...
최근에는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등 어마어마한 클럽과 관련된 이적 루머들이 나오고 있다. 손흥민이 그 팀에 가서 비빌 수나 있겠냐, 루머는 루머다 등등 다소 부정적인 반응들도 꽤나 많이 볼 수 있는데, 나는 잘할 거라고 믿는다. 우승컵 하나 없는 토트넘에서 재능 낭비하지 말고 더 좋은 팀으로 가서 우승하면서 커리어를 쌓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마음껏 응원할 수가 있으니까. 더 이상 몰래 손흥민 골 영상 보면서 흐뭇해하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