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일을 만들지 말자
신분당선 지하철 내에는 다른 지하철에서 볼 수 없었던 정보가 표시되고 있습니다. 다음 역까지 '남은 거리'와 지하철의 '속도'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표시가 되면 좋을 정보들이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이나 '도착 예정 시각'이 없습니다.
이 두 정보가 있다면 나머지 정보들을 굳이 더 할 필요는 없습니다. 표시하고 있는 속도와 거리 정보를 참고해서 보는 이가 계산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설마 그와 같이 사용성을 의도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습니다.
물론 운행 중에 살짝살짝 속도가 변하기에 도착 예상 시간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치 인터넷에서 파일을 다운로드할 때 변하는 예상시간처럼 말입니다.
즉, 신분당선의 모니터에 표시하는 정보는 할 수 있는 것들만 하느라 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존의 버스 노선도입니다.
이를 디자인 한 관계자들은 사용자에게 무엇을 반드시 전달해야 하고 '할 수 있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이 없었거나, 여러 이해 관계자들의 관점이 뒤 섞이면서 생겨난 문제를 최종 책임자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래 링크들의 내용을 참고 부탁 드립니다) 요약하자면, 정류장을 기준으로 버스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표시하지 않았거나 출발지와 목적지만 표시해 놓은 버스 노선도의 불편 사례입니다.
- 버스 방향 콕 짚어주는 화살표 청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04/2012050400083.html?Dep0=twitter&d=2012050400083
- 거꾸로 가는 버스노선표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20221.22012212003
그래서 이 불편은 고스란히 정류장에 선 버스 승객이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는 '익숙하고 당연한' 불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하지만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지는 것이죠. 물론, 어떤 분들은 '나랏일에는 다 뜻이 있다'라는 생각으로 '불편'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요즘의 '사업'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익숙한 불편'과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또는 존재하는 기술과 힘으로 이와 같은 '불편'들을 없애는 것이 목표인 것 같습니다.
즉, 할 수 있는 것들과 익숙한 것들, 당연한 것들을 잘 해 가는 게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거나 피해야 하며 반드시 바꾸어야 할지를 잘 찾아내는 게 재능이고 기술이고 경쟁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더 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해놓은 것들만을 가지고 '덜 함'으로 해서 고객의 필요를 충족시켜 준 예를 보겠습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라디오와 GPS입니다.
그 둘은 지하주차장이나 깊은 산속, 터널에 들어가면 신호를 잡지 못합니다. 더구나 GPS는 고가도로 아래, 건물 사이, 실내만 들어가도 정확히 동작하지 않습니다.(최근에 들어서야 WiFi, 블루투스 신호를 근간으로 그 정확도를 높이고 있긴 합니다만 오차범위는 여전히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장 중요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했고 나머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응용 제품들의 출시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터널, 건물 사이, 고가 도로 아래에서도 GPS가 정확하게 동작하게끔 기술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면 지금도 GPS를 탑재한 제품들은 출시되지 않았겠지요.
요즘은 제품이 프로토타입 수준으로 준비되더라도 그 존재를 알리는 사례가 많은 것 같습니다. 프로토타입 수준의 제품을 출시해서 처음에는 악평(과 욕)은 좀 듣더라도 주옥같은 피드백을 수집하여 조금씩 더 나은 제품으로 개선해 가는 전략이 자주 눈에 보입니다. 그와 같은 전략이 잘 수립되고 성공하려면 '더 하지 말고 덜 하기' 위한 안목이나 능력은 정말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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