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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Feb 07. 2022

예민:하다

마음껏 예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함축적인 한 단어가 있다면 바로 '예민함'이다. 가만히 앉아 나의 성격과 취향, 라이프스타일을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적절하기는 어렵다. 어제 독서모임에서 '당신은 예민하신가요?'라는 질문이 나왔는데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예민함은 뭘까? 그건 인식, 인지, 사색, 관계 등 인간의 여러 정신활동이 보다 더 섬세하고 날카롭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남들보다 훨씬 강력한 센서를 달고 다니는 모습이랄까? 단순히 오감으로 대표되는 신체적 감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내면의 해석이 보다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쪽에 가깝다. 자연스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아간다.


예민한 사람은 항상 삶에 대한 옅은 피로감을 느낀다. 더 심하면 스트레스나 짜증, 우울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예민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 불필요한 자극이 제거된 환경. 둘, 예민함이 부드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 영화 <맨 오브 스틸>에는 감각이 인간에 비해 지나치게 뛰어난 슈퍼맨이 괴로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민함을 조절할 수 있게끔 훈련을 하고, 부모님의 지속적인 격려를 받고 지구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






이런 예민함이 어디에서 발현되는지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그 와중에 전부 두 글자로 통일한 것도 예민한 나답다(...)


1. 업무


난 작업 공간에 물건을 거의 두지 않는다. 업무시간에 펼쳐 놓았던 서류나 필기구도 퇴근 시간에는 전부 서랍이나 통에 넣어둔다. 컴퓨터도 아주 단순하게 관리한다. 바탕화면에도, 각 폴더에도 꼭 필요한 파일만 둔다. 모든 파일은 제 자리가 있어야 하고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면 곤란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PC 바탕화면에는 폴더 하나와 휴지통만 있다.


일을 할 때 누군가 지켜보거나 간섭하는걸 극도로 꺼린다. 전 회사에서는 상사가 실시간으로 감시를 하다가 바로 메신저를 날렸는데 큰 스트레스였다.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들어와서 헤집어놓으니 의욕도 잘 나질 않았다. 차라리 독방에서 혼자 일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다. 당시엔 사원부터 사장까지 다 같은 층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왔다 갔다 하며 간섭을 하는 게 참 싫었다.


그래서 예민함이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퇴사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립적이고 조용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었다.



2. 관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말이다. 나는 말에 굉장히 예민하다. 문장 안에서의 워딩, 화법, 비언어적 표현, 호칭이나 맞춤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난 달변가도 아니고 언어학자도 아니다.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말에서 배어 나오는 상대방의 인격이나 성격, 가치관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설령 그 말이 다른 사람을 향하더라도 여전히 신경쓰인다. 무심하게 내뱉은 한 마디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매 순간 완벽할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다만 표현하는 단계에서 한번 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기대를 품는다. 나 자신도 매 순간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다. 말은 한번 뱉으면 상대방의 가슴 안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치고도 여전히 남는다.


안 그래도 내향적이라 관계를 신중하게 맺는데, 말투 따위를 신경 쓰다 보면 결국 몇 사람이 남질 않는다. 그래도 이게 훨씬 낫다. 사적인 관계에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는 없다. 여기에 공적인 관계까지 원활하게 가져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3. 공간


의외로 극도로 정리되거나 텅 빈 공간은 못 견디는 편이다. 굳이 말하자면 미니멀리즘을 지향하지만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는 없는 사람이랄까.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이 낫다. 자연은 그 자체로 큰 자극 없이 나의 존재를 받아들여준다. 이렇게 보면 불필요한 자극의 원천은 대부분 타인이다.


공간에서는 조명이 가장 중요하다. 쨍하게 비치는 형광등 불빛보다는 살짝 어두운 조명을 선호한다. 조명은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일렬로 쭉 늘어선 형광등 아래에서는 금세 지친다. 넓은 통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불빛에 타들어가는 건 사절이다.


집에 있을 때에는 직접 조명을 끄고 간접 조명을 주로 활용한다. 스탠딩 조명 하나, 테이블 조명 하나 이런 식으로. 본가에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직접 조명을 마주한다. 밥을 먹거나, 가족끼리 앉아서 얘기를 하거나 하는 순간. 에너지를 충전할 독립적인 공간이 절실하다. 돈을 벌어야 할 동기가 하나 더 생겼다.



4. 감각


비염인 주제에 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진한 향수나 디퓨져 향을 맡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담배 냄새나 지독한 체취를 맡으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골목길에서 담배를 하나씩 물고 다니는 분들을 보면 마음속에 지옥이 펼쳐진다. 피할 수도 없다. 뒤통수를 호되게 때려주고 싶다.


평소 디자인도 하고 있는지라 예민함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다. (디자인을 잘한다는 말은 아니다) 디자인에서의 감각이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아무튼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대학생 때는 파워포인트에서 폰트 하나, 도형 하나에도 그렇게 의미부여를 해댔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아무튼 결과물은 좋았다.


누군가 몸에 손을 대는 것에도 꽤나 예민한 편이다. 이는 사실 감각의 문제라기보다는 타인과 일정 거리를 두고 싶기 때문이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집적거리면 몸이 움츠러든다. 머릿속에서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무한 반복 재생된다. 친근감의 표시니까 참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조금은 반갑다.



5. 생각


사실상 가장 예민한 부분은 생각이다. 글을 매일 쓰면서 소재를 찾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특성이 있을까. 물론 매사에 생각을 깊게 하면 인생이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만 고민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생각에서의 예민함은 즐거움에 가깝다. 어차피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깊게 하면 반응이 늦다. 그래서 말이 나오다가 턱 하고 막힐 때가 있다. 대답을 재촉하거나 그냥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말하라고 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아니, 이런 것도 생각해야 하고 저런 것도 생각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냥' 말할 수 있지? 이것 또한 생각이니 대답은 더 늦어진다. 그러다 생각의 아귀가 맞으면 쉼 없이 얘기를 한다. 그러면서 또 생각을 한다. 여기서 더 뭔가를 끄집어낼 수 있을까? 반대로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그래서 글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생각의 예민함이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떠돌던 생각의 조각이 정제된 형태로 하나씩 쌓여간다. 타인의 피드백도 시차를 두고서 받을 수 있으니 아주 마음에 든다.






만약 예민한 성격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스스로를 탓하지 말자. 세상은 내가 가진 예민함이나 섬세함에는 관심이 없다. 잘 챙겨주지도 않는다. 그저 왜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냐고 책망할 뿐이다. 군대에 있을 때, 전 회사를 다닐 때 나의 예민함은 짐짝에 불과했다. 예민함 따위는 필요가 없는데다 조직의 힘으로 있는 힘껏 누르는 곳이었으니까.


예민함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책망할 수 없다. 다만 예민한 성격이 잘 안착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힘들다. 잘 다뤄지기만 한다면 예민함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다. 객관적으로 좋은 건 내겐 의미가 없다. 사람이든 일터든 공간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저 맞는 곳을 찾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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