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과몰입 금지

문을 열고 나오니 모든 건 환상이었다

by 신거니

회사에 앉아 가만히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게 하나의 연극 같다고. 난 사원의 연기를 하고, 팀장은 팀장의 연기를, 임원은 임원의 연기를 한다. 높으신 분이 한마디 던지면 적당히 호들갑도 떨어줘야 하고, 정해진 대본에도 장단을 맞춰야 한다. 모두가 꼼짝없이 정해진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면 각자의 집에서 다른 배역을 맡는다.


회사 밖에서 우연히 회사 사람을 만나면 어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치 영화 단역배우를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뚱맞다. 물론 알고 있다. 저들에게도 당연히 회사 밖에서의 삶이 있다.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한 번씩 운동도 한다. 그런데 이 당연한 전제가 왜인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모습인데도.


'자연스럽다'는 관념마저도 회사의 논리에 의해 성형된 걸까. 팀장은 계속 팀장일 것만 같고, 사원은 계속 사원일 것만 같은 이 이상한 기분. 차라리 모두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믿는 게 속 편하다. 이들은 생소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잠시 회사 지붕 아래에서 연기자로 살고 있을 뿐.






유발 하라리 교수는 현실을 세 가지로 나눈다.


1. 객관

2. 주관

3. 상호 주관


'객관'은 외부세계에 있는 일체의 존재를 말한다. 하늘에 떠있는 별, 마당에서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여기에 해당한다.


'주관'은 내면에만 존재한다. 내 안의 감정, 생각 등 오로지 자신만이 경험할 수 있다.


'상호 주관'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통해 실체를 가지게 되는 '주관'이다.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고 서로 합의한' 무언가다. 언어, 국가, 종교, 법, 회사 등 사실상 인간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은 상호 주관이다.


축구 경기장에서 한일전이 열린다. 한국은 존재할까? 일본은? 애초에 축구 경기란 정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걸까? 물론 축구 경기장, 축구공, 한반도, 일본 열도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 위에 스포츠, 국가라는 개념이 생긴 건 모두가 그렇게 합의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약 백 년 전 한반도를 식민 통치했다. 한반도라는 땅덩어리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물론 강제적인 합의였지만.






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는 지독하게 심심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어느 날 책상을 양탄자로 부른다. 침대는 그림으로, 의자를 자명종이라고 불렀다. 결국 모든 단어를 바꿔버린 남자는 타인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졌다. 상호 주관은 합의되지 않으면 그저 주관에 그치고 만다. 심하면 사회에서 매장당한다.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건 연기라는 사실을. 난 사원이라는 직책 내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사원 그 자체는 아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자신은 그저 자신일 뿐이다. 세상은 개인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고 그게 너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사회라는 프레임을 손쉽게 굴릴 수 있다.


일시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과몰입을 할 때 터져 나온다. 공공연히 벌어지는 소위 '갑질'은 자신의 역할에 과몰입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환장의 하모니다. 난 고객이니까, 상사니까, 나이가 많으니까, 선배니까, 갑이니까 얼마든지 함부로 해도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규칙 따위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내가 맡은 역할이 상호 주관임을 깨닫는 순간,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냥 원래 당연히 의례히 본래 그런 건 없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숨을 헐떡이고 사람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상호 주관의 영향력은 정해진 영역에 그치고 만다. 문을 열어젖히고 나가면 그만이다.


나와야 한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그 무언가에게서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고 있다면 말이다. 상호 주관이 빚어낸 환상에 속지 말자. 차라리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라도 감싸자. 난 선택할 수 있다. 난 선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