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참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by 신거니

입사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았을 때, 난 알았다. 언젠가 짐을 꾸려 이곳을 나서리라는 걸. 당장 박차고 나갈 정도로 못 견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을 바칠 만큼 알맞은 대상도 아니다. 딱 적당히 버틸만할 때, 난 이별을 준비한다. 배낭을 풀어 하나둘씩 여장을 꾸린다.


퇴사는 끝이자 시작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마저도 준비과정에 불과하다. 다음 목적지에 안착해야 퇴사는 아름답게 결말을 맺는다. 거기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다시 떠나야 한다. 온전히 안길 품을 찾기 위해서.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돈을 많이 주는 곳? 재밌는 곳? 안정적인 곳? 결론부터 말하면 답은 내면에 있다. 내면에 거슬리지 않는 곳,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곳, 한마디로 참자아에 걸맞은 곳.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 참자아를 찾기 위해 명상이라도 해야 할까?


사실 꼭 그렇지는 않다. 명상은 내면세계를 정리하는 청소부와 같다. 답을 물어다 오는 건 밖을 쏘다니는 경험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내면에 생각을 들인다. 책이든 강연이든 직장이든 여행이든 들어오는 게 있어야 정리될 게 있고, 그 과정에서 참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작은 두근거림에 그친다. 그러다 점점 내면에서 크기를 키워간다. 그 마음이 감출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야 한다. 표현하지 못하면 마치 상사병이 나듯 병이 생긴다. 숨이 막히고 한숨이 늘어간다. 밤에는 잠이 오질 않고 쉽게 우울해진다. 마음의 병은 몸을 통해 나타난다. 여기저기 아프고 숨쉬는 것도 버겁다.


내면은 까탈스러운 미식가와 같다. 생각보다 호불호가 확실하다. 기성품처럼 쏟아지는 외부세계의 속삭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다. 천성, 참자아, 뭐라고 불러도 좋다. 그 열쇠 구멍에 맞는 열쇠는 따로 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세상을 뒤진다. 그 하나의 천직을 찾아.


그런데 찾기가 어렵다. 웬만한 회사는 마음에 들질 않고 직업 백과를 뒤져도 느낌이 오질 않는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저 바깥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내 노력이 부족한 건가? 조금 더 경험을 많이 해야 하나? 아니면 애초에 그런 건 없는 건가?






처음부터 없다. 천직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없다면 만들면 된다. 아니, 만들어야 한다. 천직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뿌리에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듯이 정성스레 빚어낸다. 내가 나를 키우고 나의 천직을 키운다. 천성과 참자아에 맞는.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드는 이는 필연적으로 방황한다. 남이 깔아 둔 트랙 위를 달리는 기차는 방황하지 않는다. 고작해야 달릴까, 멈출까를 고민할 뿐이다. 바닷속을 유영하는 고래는 다르다. 정해진 방향도, 표지판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따라가야 한다. 그 내면은 어떤 추상적인 정신세계가 아니라, 내가 두 발로 걷는 시간의 지표면으로 나타난다.


시간의 발자국이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찍힌다. 설령 목표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과정을 즐겼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로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떠난 여행이다. 그리고 먼 훗날 뒤를 돌아봤을 때, 내가 가른 물살이 마치 은하수와 같이 세상을 수놓는다. 그 흔적마저 언젠가 하얗게 부서져 잊히겠지만 나만은 나를 기억한다.


난 나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을까? 삶을 기억하는 자체보다 놀라운 건 무엇을 기억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난 남에게도 기억되지만 미래의 나에게도 기억되는 존재다. 그에게 뭘 줄 수 있을까? 끝에서부터 시간을 되짚어 지금의 나에게로 도착한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