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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May 09. 2020

훈자, 내 마음이 살고 있는 곳

KKH - Karimabad, 2005


1.


훈자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중국 최서단 도시인 카쉬가르(Kashgar)에서 하루에 한 대 있는 국제버스를 타야 했다.

서울의 마을버스쯤 되는 성능을 가진 고물차였지만 그게 최선이자 유일한 선택지였다.



'카라코룸 하이웨이 (Karakorum highway)'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중국에서 10년, 파키스탄 쪽에서는 무려 20년이 걸려 완공한 장장 1200km의 도로이다.


해발 4963m에 위치한 중국-파키스탄이 놓인 쿤제랍 패스(Kunjerab pass)를 통과하는 이 길은 힌두쿠시 산맥과 쿤룬 산맥,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들을 가로지른다.





버스가 출발한 지 1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여러 가지 걱정들이 앞섰다.

대관령도 못 넘을 것 같아 보이는 차로 히말라야를 넘는다는 것도 그렇고, 금세라도 터질 것 같은 성난 엔진 소리와 그에 질세라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날카롭고 경쾌한 사운드의 인도 음악에 과연 내 귀는 괜찮을까 하는 걱정,

게다가 이틀 반이라는 만만치 않은 운행시간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하지만 고도가 올라감에 따라 고산병 증세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걱정은커녕 머릿속에는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간절함 외에 아무 생각도 들 지 않았다.

극도의 건조함으로 입술이 바싹 바짝 마르면서 깨질 듯한 두통과 매스꺼움이 시작됐다.



버스의 에어 서스펜션 - 과연 그런 게 있었을 지도 의문이다- 과 일체가 된 의자가 쉴 새 없이 몸을 튕겨냈고

이따금씩 장식처럼 달아놓은 창문에 매섭게 머리를 박을 때면 일시적으로 고산병 증상이 완화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불행인 지 다행인 지 버스는 1시간에 한 번 꼴로 알아서 쉬는 시간을 가졌고

운전기사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묵묵히 내려서 이곳저곳을 두드리고 나면 다시 꾸역꾸역 차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런 휴식 시간이라도 있었기에 몇 장 되지 않는 사진들도 남길 수 있었다.


몸이 힘들어질수록 눈앞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그 풍경이 너무나 생경하고 신비롭게 느껴져 마치 내가 지구가 아닌 행성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두 손에 카메라를 꼭 쥐고 넋 나간 사람처럼 창 밖을 응시하는 시간이 많았다.



2.


구름조차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풍경 안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중 어떤 곳은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사람이 밟지 않은 땅일지 모른다.

초월적 존재가 강림할 것 같은 신화의 세계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 땅이 마치 진공의 공간처럼 느껴져 왠지 모를 외로움과 쓸쓸함이 밀려왔다.

새삼스럽게 인간계에 속해 있는 이 고물버스 안의 야릇한 냄새와 인기척에 감사했다.


중국- 파키스탄 국경이 놓인 쿤제랍 패스


4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의 색감은 낮은 곳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또렷하다.


비싼 초고화질 티비 화면에서처럼 현실에 없을 법한 과장된 대비와 채도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살면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환상 체험과도 같다.
거리로 따져보면 엊그제에 비해 수 천 미터나 태양에 더 가까운 곳에 도달해있었다.



국경 근처에서 또다시 주저앉은 버스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튼실해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를 에워 싸고 있었다.


'snow leopard!'라고 누군가가 알려주었다.


눈표범.. 잘 못 들은 건가?



히말라야와 일부 산악지대에만 서식하는 멸종위기종을, 야생에서도 보기가 힘들어 '산의 유령'이라고 부른다는 그런 희귀 동물을 여행길에서 만난 것이다.

그런 녀석이 어쩌다가 이런 곳에 있게 되었는지 없었지만 여행 중에는 정말 별의별 만남이 다 있다.


녀석은 아직 새끼였지만 역시나 맹수답게 두툼하고 묵직한 발을 가지고 있었고 영롱하다는 단어로도 부족한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런 원초적 아름다움을 접할 때면 창조주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해가 지기 직전에 파키스탄 쪽 국경도시 소스트(sost)에 도착했다.

그곳은 딱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 중에서도 일부만 갖춘 작은 마을이었다.


버스의 진동이 몸에 배어 오랜만에 밟은 땅에서도 떨림이 느껴졌다.

더운물이 나오지 않는 숙소였지만 무엇이 되었든 씻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감사했다.


히말라야 자락에서 보는 밤하늘은 상상 이상이었다.

파란빛이 감도는 검은색 도화지에 누군가 실수로 설탕통을 엎으면 비슷한 그림이 되겠구나 싶었다.


땅보다 하늘이 더 밝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밤이었다



요즘도 이따금씩 밤에도 뿌연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별 헤던 밤을 그리워하고 있다.




3.


카쉬가르를 출발한 지 사흘 만에 훈자 (Hunza)에 도착했다.

쨍쨍한 날씨에 기온도 적당했고 분명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피곤에 절어서 뭔가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Murberry inn - 우리말로 하면 오디 여관'이라는 목가적인 이름의 숙소를 잡고 짐만 던져둔 채로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도 전 날 못지않게 햇살이 좋았기에 근 일주일 만에 묵은 빨래를 처리했다.

오랜만에 바삭하게 마른빨래를 보겠구나 싶었다.



생리적 욕구와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고 나니 그제야 주위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눈 앞에는 몇 달 전부터 보고 또 보던 사진 속 풍경들이 있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서있는 바위는 처음 보는 사람이면 누구든 멈춰 세울 만큼 웅장했다.

압도적 스케일이라는 말은 인간이 만든 어떤 것 따위에 붙이는 수식어가 아니었다.


황량함과 청량함 사이라는 것도, 그런 고대비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풍경도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었다.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 어디쯤에 있는 그런 세상 같아 보였다.  



간절함이 현실로 나타났는데도 마음 한 구석은 계속 불편했다.

살면서 이런 풍경을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면서도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그런 기분이었다.


훈자 마을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 정도 절경을 앞에 두면 나같이 평범한 사람도 시 한 구절 정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줄곧


'오늘도 나의 내면은 더 깊은 곳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더 넓게 퍼졌을 것'이라고 되뇌며

조바심 내지 않고 이곳에서의 시간들을 즐기기로 했다.


너그럽게 흘려보내는 길 위의 시간이 가끔은 내 편이 되어줄 때도 있었다.





4.


훈자에는 택시가 없다.

대신 '스즈키'라고 부르는 승합차가 종일 부지런히 사람들을 아래 위로 실어 나른다.


안 그래도 느린 여행이었지만 이곳에선 더 느긋했다.

산과 산 사이 얼마 되지 않는 평평한 땅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멍하게 산을 바라보거나 스즈키를 타고 마을로 내려가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나무와 흙, 돌로만 지어진 집들은 아마 100년 전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고

모두가 평등하게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였지만 그들의 눈빛은 아늑하고 선했다.

궁핍한 삶이 새겨놓은 어두움과 주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동양과 서양이 다 들어가 있었다.


내쇼널 지오그래픽 표지에서 보았던 강렬한 녹색 눈동자의 소녀가 생각났다. 아프가니스탄 소녀였으니 여기서 멀지 않은 이웃일 터였다.



마을 사람 모두 따뜻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웃한 중국, 인도 사람들과도 파키스탄 남부 사람들과도 달랐다.


긴 여행 중에는 때로 장엄하고 숭고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될 때가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외지인도 이러하니 이 위대한 자연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질도 풍화되는 바위처럼 오랜 시간 동안 순하고 둥글게 다듬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고작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 갇혀 아등바등 살아가는 도시의 철없는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섭리일 것이다.



여기저기 푹 익은 살구가 무심히 떨어져 있는 돌담길을 지나면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일상이 보였다.


우리네 시골과 다르게 어딜 가든 아이들이 많았다.

허공에 맴도는 아이들의 웃음이 반짝이는 마을을 더욱 밝게 했다.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했다.

마을에 머무른 지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은 나에게 더 많은 것들을 물었고 모두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서로 얼마나 제대로 알아들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매일 현재와 과거,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은 꽤 흥미로웠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나게 놀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뻣뻣해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워서 여러 번 혼자 웃었다.

그들은 모두 액정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그리도 맑은 사람들을 보면서 혹여 나의 흔적들이 이 곳에 어떤 영향이라도 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계곡처럼 그들의 영혼도 때 묻고 물들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는 훈자 마을에서 26번째 생일을 맞았다.


숙소 스태프인 압둘라와 베니가 손수 생일상을 차려주었고 새로 친구가 된 마을 사람들에 둘러싸여 축하를 받았다.

우루두어로 합창하는 생일 축하 노래도 들을 수 있었다.

진짜 내 생일 같았다.


아직도 멀뚱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진 속 그들을 보며 웃곤 한다.

그때마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부른 토니 베넷처럼 내 마음의 한 조각도 그 이후로 줄곧 훈자 계곡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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