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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May 03. 2020

Germinal : 싹 트는 달

경남 하동 / 2019. 4


1.


작년 4월의 지리산. 


깊은 산속의 봄은 사람들이 사는 곳 보다 조금 더딘 듯 했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다보면 


겨울의 더께를 뚫고 나온 새싹들과 세상에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친숙한 꽃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눈 길 머무는 곳마다 봄의 선물이 가득했다.





2.


이튿 날에는 종일 이슬비가 내렸다. 


진한 녹차내음과 바로크 음악이 그의 집과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오래된 시골집 툇마루에서 감상하는 빗소리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오후였다.


집 근처만 한 바퀴 돌아도 먹거리가 지천이었다.  


뒤뜰에서 캐 온 실팍한 쪽파 몇 줄기와 곰삭은 김치를 준비한 다음 


대나무 잔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달궈진 돌판 위에서 고기를 구웠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불꽃을 바라보며 걸쭉한 탁주 한 잔 곁들이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3.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자랐을까?'


촉촉하고 보송해진 흙을 밟으며 다시 산행에 나섰다. 

하루 동안의 비로 인해 어제까지 아무것도 없던 곳에 제법 굵은 싹들이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땅두릅, 둥굴레, 얼레지, 가죽나물, 고비.. 


우리네 나물들은 이름도 참 아름답구나 싶다. 

움트는 생명의 결실에 신비함과 감사를 느끼며 먹을 만큼만 뜯어 가방에 담았다. 

가격표도 없는 자연의 선물이자 그만큼 값진 재료임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약간의 찬거리를 곁들여 소박한 상을 차렸다. 

고기 한 점 없는 채식 밥상이었지만 어디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맛이었다.


잘 차려진 식탁의 이면에 드리운 야만과 잔혹의 그림자를 떠올리고

세상 한쪽에서 누군가는 이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밥상이었다. 


집에서든 업장에서든 나는 언제 이런 밥상을 차려보았나 기억을 더듬어본다.






4. 


맨발에 고무신 차림으로 험준한 산자락을 오르는 친구를 쫒다 보니 온몸의 근육들이 총동원되는 것 같았다.  

숲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가쁘게 숨을 내뱉으며 이 며칠 사이에 내 가슴속은  얼마나 정화되었을까 생각했다.


친구와 나는 둘 다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많이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대화 대신 차와 음악을 음미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거나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매일 함께 고요한 숲을 걸었다. 


세간살이조차 변변치 않은 곳에서 말 그대로 자연을 벗 삼아 사는 그의 삶이 

때론 부럽기도 하면서 어떻게 저리 살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했다.




"맑은 마음의 친구가 걸어오면 내 마음도 환하게 맑아져 간다."



예전에 읽었던 박노해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멀리 앞서서 걸어가는 친구와 그 문장이 잘 어울렸다. 


다음에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내려와서 친구와 조금 더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다. 

함께 대나무 바구니라도 만들면 괜찮은 그림이 될 것 같다. 




#요리사가 되는 길 #식재료 채집 #자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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