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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Jul 20. 2020

무려 부산 출장

용길이네 곱창집, 2018 

부산에 간다고 하면 뭐 먹을까부터 고민했었는데

그걸 안 하니 뭔가 허전했다. 

심지어 푸드 필름 페스타. 음식 영화제 초청으로 가는 출장인데 말이다. 


연해주에서 구해왔다는 non GMO 콩으로 만든 유기농 두유를 한 손에 쥐고 

(삼육두유에서 만들어서인가 기존 삼육두유랑 똑같은 맛이 난다.) 

부산 비건 식당의 현황 파악을 위해 검색에 돌입. 

서울만큼 많지는 않지만 몇 군데 가보면 좋을 곳들을 찜해두었다. 


원래는 타는 곳 3.4번과 5.6번 사이에 있는 마약김밥 (상호는 아님)을 먹으면 되겠구나 했으나, 

새집에서 서울역 가는 시간을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원래 표를 취소하고 시간이 남아서 

롯데리아의 비건 버거인 미라클 버거를 먹으리라 생각했다. 

메뉴의 다양성도 확보하고 아침의 비건 버거라는 훌륭한 선택까지. 흡족한 계획이었다. 



하나 무슨 일인지 서울역 롯데리아에는 미라클 버거가 없었다. 

아니 왜. 다른 지점은 몰라도 서울역 점 같은 곳에서는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ㅠ 


잠시 주위를 배회하다가 비빔밥으로 결정했다.             


'후라이는 빼주세요. 다진 고기요? 네 그것두요, 넵.' 


비빔밥 먹고 나오는데 맞은편에 호두과자 매장이 보인다. 

가장 작은 포장이면 12개가 들어가는데 가는 길에 8개 먹고 남겨놨다가 오는 길에 4개 먹었었다. 

잠시 잠깐 생각해본다. 

마가린은 오케이. 

하지만 가여운 오랑우탄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있는 팜유와 먹을 수 없는 달걀이 들어가 있다. 

그래 호두과자 정도는 가볍게 참을 수 있다. 



부산에 도착해서 바로 미팅을 하나 했다. 

커피와 양과자를 먹기 좋은 시간대였다. 


당근케이크, 치즈케이크, 밀푀유, 블루베리요거트....

죄다 버터 혹은 유제품 함유. 

커피가 우울해할 것 같아서 대신 동방미인을 마셨다. 

대만에는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미팅이 길어지는 바람에 영화를 놓쳐 영화의 전당에서 멀지 않은 수영 팔도시장에 갔다.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우선 물떡을 하나 먹고, 입구 구석진 곳에 있는 적당한 술집을 발견. 

보면 속만 상하는 메뉴판 안에는 그래도 먹을 게 몇 개 있었다. 



기본찬이 깔렸다. 다 먹을 수 있다. 


"호래기를 다지 느으가 색깔이 쫌 끔씁니다." 


믿고 주문했던 땡초정구지 지짐 (고추 부추전)이 나왔는데 짙은 회색빛이었다. 

꼴뚜기를 다져 넣었더니 먹물 때문에 전 색깔이 검게 되었단다. 

다시 한번 관용을 베풀어 꼴뚜기 살만 쏙쏙 빼고 먹었다. 


방아와 부추, 고추 향의 하모니. 허브는 비건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함께 주문한 두부김치도 훌륭했다. 

대낮부터 신나게 마셨다. 



방역 철저한 영화제 분위기. 

전국에서 올해 처음 개최되는 영화제인 만큼 주최 측에서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것 같다. 

작년과 거의 똑같은 구성으로 푸드트럭이 출점해 있었는데 

벨지안 프릿츠 (감튀) 트럭에서 플레인으로 하나 구매하고 고릴라 브루잉과 프라하 993에서 맥주를 구매했다. 

신난다 나도 축제다. 



초청석에는 도시락이 깔려 있었다. 먹을 수 있는 게 1/3 정도 있었다. 

오래간만에 (수트 입은) 준우씨도 보고,  황(교익)쌤도 뵈옵고, 주강재 솊과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 


오프닝 상영작은 '용길이네 곱창'

아 이런... 곱창 영화라니..  더욱 속도를 내어 맥주로 배를 채웠다. 

일본 생각, 동기들 생각, 그 시절 우리 동포들에 대한 생각...


뒷머리를 살랑이는 바람이 좋았다. 

이런 시기에 밖에서 보는 영화라니. 주최 측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갈 수 없지. 그래. 

노인네들이 포진해 있을 VIP뒤풀이를 피해 해운대 시장 안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떡볶이 떡을 열심히 먹고, 튀김옷을 벗겨낸 고구마를 먹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셨다. 


문득문득 비건인으로서의 첫 해장은 뭘로 해야 하나, 그것도 부산에서...라는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그것은 내일의 김태윤에게 맡길 문제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숙소 앞 편의점에서 맥주와 추로스 과자를 샀다. 

창밖을 보며 추로스를 반 봉지쯤 먹다가 서늘한 기분이 들어 봉지를 뒤집어보니, 아... 잇... 팜유. 


미안해 오랑우탄.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만 먹을게. 

엄마 품에 안긴 귀여운 아기 오랑우탄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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