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이며 특별한 감정들

보이후드(Boyhood), 2014

[7일 차]


오늘도 두유로 시작하는 아침.


오늘부터 메뉴 테스트가 시작되는 날이다.

메뉴 테스트를 한다는 건 시식도 해야 한다는 것.

직업이 음식을 만들고 먹어보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려서 먹거나 맛만 보고 뱉어 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내 신념을 지키겠다고 가까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그리고 재료가 무엇이 되었든 누군가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음식은 귀하고 소중하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우리의 테스트 메뉴 중 비건 메뉴들이 있다는 사실.

그중에서도 오늘은 비건 짜장을 테스트한다.

이 메뉴에는 전에 눈여겨보았던 비건 어묵 제품을 사용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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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이나 밀 베이스의 제품들의 경우 식감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풍미 면에서

대체하려고 하는 재료에 못 미치거나 경우에 따라서 살짝 거슬리는 향이 날 때가 있는데,

몇 가지 테스트를 해 본 결과 강한 맛의 소스와 함께 조리하는 요리에 사용하면 그 한계를 경감시킬 수 있었다.

비건 어묵도 그런 점에서 짜장이든 고추장이든 떡볶이의 맛에도 잘 녹아드는 것 같다.


비건 어묵과 같이 주문했던 다른 비건 푸드들도 도착했다.

바로 비건 디저트 하나를 까서 맛을 보았다.

감사하게도 초콜릿 맛의 뭔가를 샘플로 주셨는데 먹어보니 코코넛 로쉐 (roche coco)였다.


아주 예전, 학교 수업 때 만들었던 기억이 났다. 코코넛을 좋아해서 그때도 맛있게 먹었었다.

원래 레서피에 흰자가 들어갔던 것 같은데 흰자는 큰 역할을 하는 재료는 아니니 이 정도면 훌륭하다.

비건에게 코코넛도 고마운 식재료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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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로터스 크럼블이라고 쓰여 있어서 연자를 사용한 건가 싶었는데

어딜 봐도 견과류가 없어서 보니 로터스 과자를 썼다는 말인 것 같았다. 너무 많이 갔다;;

중간층에 잼이 발라져 있는 squares 같은 종류의 과자인 것 같았는데 맛있었다.

구매했던 사이트에서 '비건 빵입니다. 다이어트 빵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한 문구를 봤었는데,

먹어보니 왜 그런 지 알겠다.

지난 며칠간 내가 음식을 먹는 패턴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비건식은 오히려 탄수화물이나 당 중독을 유발할 수 있을 듯하다.


채식한끼 라는 앱을 사용해서 검색해보니 서촌과 그 주변에만 해도 비건 옵션을 제공하거나 비건 식당인 곳들이 꽤 있었다.

노동이 많았던 하루였기에 밥상 차리기가 귀찮아서 그중에 한 곳을 가보기로 했다.



사찰음식을 내는 곳이었는데 단품과 코스를 팔고 있었다.

배냉면과 우엉잡채를 주문했다.

우엉잡채는 상상하는 맛 그대로였는데 많이 달았다.

실제로 절에서도 이런 음식이 이 정도 당도로 스님들에게 제공되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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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냉면은 좋은 선택이었다.

배와 오이를 듬뿍 넣어서 한층 시원한 맛을 내고 베이스로 사용되었을 채수도 꽤 깊은 맛을 내고 있었다.

큰 한옥 두어 채를 이어서 만든 공간이었는데 손님이 우리 밖에 없어서 홀이 썰렁했다.

이 가게에서 10미터 떨어진 곳에 전국구로 유명한 삼계탕 집이 있다.

식사를 잘 마치고 나오는 길에 보니 저녁 식사 때가 끝나가는 시간인데도 줄이 늘어서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저 가게에서 몇 마리의 닭들이 소비되었을까.'


어두컴컴한 평사에 닭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계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동네에 30년 넘게 살면서 그 가게 앞을 수백 번 지나다녔는데 이런 류의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가게 앞 쇼윈도에서 줄줄이 꼬챙이에 꿰어져 돌아가고 있는 전기구이 통닭이 오늘따라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8일 차]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치고 옥상에 올라가 텃밭을 둘러보았다.

볕이 잘 들고 비도 적당히 내려주어서인지 작물들이 기특하게도 쑥쑥 잘 자라주고 있다.

맨땅에서 새순들이 올라와있는 모습이 새삼 귀여웠다.

처음 텃밭을 만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귀찮은 마음이 앞섰는데 이젠 하루에도 몇 번씩 보러 올라오고 있다.

그간 수많은 농장들에서 느꼈던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가 재배한 잎채소들을 수확했다.

도시텃밭에서 재배한 무농약 채소.

나에게도 이런 사진을 찍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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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업무로 복귀.

오늘은 토종콩 허머스와 비건 빵 테이스팅이 있는 날이다.


선비콩과 아주까리 밤콩으로 만든 허머스와

앉은뱅이 밀, 검은밀, 금강밀 등의 우리밀로 만든 빵들이 놓였다.

이 재료들을 제품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멋진 제품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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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사실 오늘의 텃밭 수확은 어제 도착한 (비건)양념 콩불고기를 위한 것이었다.

불고기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구워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고기만 먹었다면 콩고기 식감이 거슬렸겠지만 쌈 싸서 먹으니 괜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내내,

아니 불고기 양념을 이렇게 밖에 못 만드나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디서건 주는 대로 잘 먹고 심지어 맛없는 것도 안 남기고 잘 먹는 나인데

비건식을 시작한 이후로 프로 불편러가 된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더 좋은 제품들이 나오게 되겠지 희망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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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재배 채소의 맛은 수확의 기쁨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

친절하게 이야기하면 '순박한 맛'이라고 해야 하나.

하긴 뭐 농사 기술이랄 것도 없이 비료도 안 주고 방치 상태에서 키운 것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새집은 아직도 정리가 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이 집에 온 이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처음 집을 보러 왔던 날의 감동 그대로의 풍경을 매일 마주하며

저 건물은 어디에 있는 그 건물이겠구나, 저건 설마 아차산인 건가, 그럼 하남이란 말인가 하기도 하고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이 위치한 자리에 빽빽하게 차 오른 녹음을 바라보며 지난가을의

후원 산책을 떠올리기도 한다.

오후 7시를 전후한 시간의 하늘빛과 비 내리는 어느 새벽의 운무를 지켜보기도 한다.


매일 몇 차례씩 터질듯한 허벅지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집 앞에 다다르지만

현관문을 열기 직전에는 금세 다시 기다리는 자의 마음이 된다.

이 또한 이전에 내가 살았던 어느 집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예고 없이 어느 날 솟아나는 텃밭의 새순들처럼

내 마음 어딘가에서도 꼬물꼬물 새로운 감정들이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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