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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Sep 12. 2020

보편적이며 특별한 감정들

보이후드(Boyhood), 2014

[7일 차]


오늘도 두유로 시작하는 아침. 


오늘부터 메뉴 테스트가 시작되는 날이다. 

메뉴 테스트를 한다는 건 시식도 해야 한다는 것. 

직업이 음식을 만들고 먹어보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려서 먹거나 맛만 보고 뱉어 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내 신념을 지키겠다고 가까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그리고 재료가 무엇이 되었든 누군가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음식은 귀하고 소중하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우리의 테스트 메뉴 중 비건 메뉴들이 있다는 사실. 

그중에서도 오늘은 비건 짜장을 테스트한다. 

이 메뉴에는 전에 눈여겨보았던 비건 어묵 제품을 사용해보기로 했다. 



콩이나 밀 베이스의 제품들의 경우 식감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풍미 면에서 

대체하려고 하는 재료에 못 미치거나 경우에 따라서 살짝 거슬리는 향이 날 때가 있는데, 

몇 가지 테스트를 해 본 결과 강한 맛의 소스와 함께 조리하는 요리에 사용하면 그 한계를 경감시킬 수 있었다. 

비건 어묵도 그런 점에서 짜장이든 고추장이든 떡볶이의 맛에도 잘 녹아드는 것 같다. 


비건 어묵과 같이 주문했던 다른 비건 푸드들도 도착했다. 

바로 비건 디저트 하나를 까서 맛을 보았다. 

감사하게도 초콜릿 맛의 뭔가를 샘플로 주셨는데 먹어보니 코코넛 로쉐 (roche coco)였다. 


아주 예전, 학교 수업 때 만들었던 기억이 났다. 코코넛을 좋아해서 그때도 맛있게 먹었었다. 

원래 레서피에 흰자가 들어갔던 것 같은데 흰자는 큰 역할을 하는 재료는 아니니 이 정도면 훌륭하다. 

비건에게 코코넛도 고마운 식재료이구나 싶었다. 




다른 하나는 로터스 크럼블이라고 쓰여 있어서 연자를 사용한 건가 싶었는데

어딜 봐도 견과류가 없어서 보니 로터스 과자를 썼다는 말인 것 같았다. 너무 많이 갔다;; 

중간층에 잼이 발라져 있는 squares 같은 종류의 과자인 것 같았는데 맛있었다. 

구매했던 사이트에서 '비건 빵입니다. 다이어트 빵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한 문구를 봤었는데, 

먹어보니 왜 그런 지 알겠다. 

지난 며칠간 내가 음식을 먹는 패턴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비건식은 오히려 탄수화물이나 당 중독을 유발할 수 있을 듯하다. 

 

채식한끼 라는 앱을 사용해서 검색해보니 서촌과 그 주변에만 해도 비건 옵션을 제공하거나 비건 식당인 곳들이 꽤 있었다. 

노동이 많았던 하루였기에 밥상 차리기가 귀찮아서 그중에 한 곳을 가보기로 했다. 



사찰음식을 내는 곳이었는데 단품과 코스를 팔고 있었다. 

배냉면과 우엉잡채를 주문했다. 

우엉잡채는 상상하는 맛 그대로였는데 많이 달았다. 

실제로 절에서도 이런 음식이 이 정도 당도로 스님들에게 제공되는지 궁금했다. 




배냉면은 좋은 선택이었다. 

배와 오이를 듬뿍 넣어서 한층 시원한 맛을 내고 베이스로 사용되었을 채수도 꽤 깊은 맛을 내고 있었다. 

큰 한옥 두어 채를 이어서 만든 공간이었는데 손님이 우리 밖에 없어서 홀이 썰렁했다. 

이 가게에서 10미터 떨어진 곳에 전국구로 유명한 삼계탕 집이 있다. 

식사를 잘 마치고 나오는 길에 보니 저녁 식사 때가 끝나가는 시간인데도 줄이 늘어서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저 가게에서 몇 마리의 닭들이 소비되었을까.'


어두컴컴한 평사에 닭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계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동네에 30년 넘게 살면서 그 가게 앞을 수백 번 지나다녔는데 이런 류의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가게 앞 쇼윈도에서 줄줄이 꼬챙이에 꿰어져 돌아가고 있는 전기구이 통닭이 오늘따라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8일 차]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마치고 옥상에 올라가 텃밭을 둘러보았다. 

볕이 잘 들고 비도 적당히 내려주어서인지 작물들이 기특하게도 쑥쑥 잘 자라주고 있다. 

맨땅에서 새순들이 올라와있는 모습이 새삼 귀여웠다. 

처음 텃밭을 만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귀찮은 마음이 앞섰는데 이젠 하루에도 몇 번씩 보러 올라오고 있다. 

그간 수많은 농장들에서 느꼈던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가 재배한 잎채소들을 수확했다. 

도시텃밭에서 재배한 무농약 채소. 

나에게도 이런 사진을 찍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잠시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업무로 복귀. 

오늘은 토종콩 허머스와 비건 빵 테이스팅이 있는 날이다. 


선비콩과 아주까리 밤콩으로 만든 허머스와 

앉은뱅이 밀, 검은밀, 금강밀 등의 우리밀로 만든 빵들이 놓였다. 

이 재료들을 제품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멋진 제품 만들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사실 오늘의 텃밭 수확은 어제 도착한 (비건)양념 콩불고기를 위한 것이었다. 

불고기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구워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고기만 먹었다면 콩고기 식감이 거슬렸겠지만 쌈 싸서 먹으니 괜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내내, 

아니 불고기 양념을 이렇게 밖에 못 만드나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디서건 주는 대로 잘 먹고 심지어 맛없는 것도 안 남기고 잘 먹는 나인데

비건식을 시작한 이후로 프로 불편러가 된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더 좋은 제품들이 나오게 되겠지 희망하는 수밖에.  



자가 재배 채소의 맛은 수확의 기쁨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 

친절하게 이야기하면 '순박한 맛'이라고 해야 하나. 

하긴 뭐 농사 기술이랄 것도 없이 비료도 안 주고 방치 상태에서 키운 것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새집은 아직도 정리가 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이 집에 온 이후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처음 집을 보러 왔던 날의 감동 그대로의 풍경을 매일 마주하며 

저 건물은 어디에 있는 그 건물이겠구나, 저건 설마 아차산인 건가, 그럼 하남이란 말인가 하기도 하고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이 위치한 자리에 빽빽하게 차 오른 녹음을 바라보며 지난가을의 

후원 산책을 떠올리기도 한다. 

오후 7시를 전후한 시간의 하늘빛과 비 내리는 어느 새벽의 운무를 지켜보기도 한다.  


매일 몇 차례씩 터질듯한 허벅지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집 앞에 다다르지만

현관문을 열기 직전에는 금세 다시 기다리는 자의 마음이 된다. 

이 또한 이전에 내가 살았던 어느 집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예고 없이 어느 날 솟아나는 텃밭의 새순들처럼 

내 마음 어딘가에서도 꼬물꼬물 새로운 감정들이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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