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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Sep 12. 2020

킨포크적 라이프와 순댓국 사이

살아있다, 2020 

[9일 차] 


메뉴 테스트 3일 차. 

어떻게 하루가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보낸 날. 


메뉴 테스트라는 것이 찔끔 먹어보고 분석하고 또 만들어서 찔끔 먹고 하는 일의 반복이라서

은근히 배가 부른 상태로 종일을 있어도 제 때에 제대로 차린 밥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속이 헛헛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이런 날은 보상심리가 가득해서 종종 배달음식으로 폭식을 동반한 파티를 하곤 했는데 

비건 살이 한 달 동안은 배달 음식도 끊어보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조용히 냉장고에 있는 나물들을 긁어모아 밥상을 차렸다. 



마침 놀랄 만큼 맛있다는 지인의 말을 믿고 구매한 초당옥수수가 도착해있었는데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옥수수는 특히나 수확한 이후 맛이 급격하게 저하되는 작물인지라 

숟가락을 내려놓고 결국 레인지 위에 찜솥을 올렸다. 

작은 솥에 옥수수를 욱여넣어가며 근 1시간가량 옥수수를 쪘더니 집안이 한증막이 되었다. 


비건살이를 시작한 이후 식사량 자체는 늘고 있다. 

배가 아주 부를 때까지 뭔가를 먹고 나서 꼭 달달한 것으로 입가심을 해야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원래도 그런 패턴이었지만 요 며칠 사이 심해진 것 같다. 

이런 것도 일종의 보상심리인가 싶다. 



[10일 차] 


고창의 감자 덕후 농부님이 보내주신 새봉 감자와 영월에서 온 초당옥수수, 그리고 미국 어딘가에서 왔을 체리로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다지 영양 균형이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차려놓으니 왠지 보기는 좋았다. 

나도 드디어 자연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삶을 추구하게 된 건가. 킨포크?



몇 주전부터 어깨가 불편하고 이따금씩 통증이 있었는데 좀처럼 나아지지가 않아 병원을 찾았다. 

오십견 초기란다. 오십견이라니...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어보니 전문 용어로는 '충돌 증후군'이라고 한단다. 어깨를 너무 많이 쓰셨다며 사족을 달아주시는 의사 선생님.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처럼 하나씩 찾아오는 나이 듦의 징후들이 아직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말 그대로 훅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천천히 친구 사귀듯 익숙해지는 게 낫을는지도 모르겠다. 

3주 넘게 불편하던 어깨가 물리치료와 소염제 투약 한 번에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역시 이제는 병원도 미루지 말아야 한다. 


메뉴 테스트와 시식회까지 끝난 기념으로 이태원에 있는 태국 식당에 갔다. 

금요일 밤의 이태원은 도대체 얼마만인가. 

근데 이리도 썰렁한 금요일 밤의 이태원도 처음인 듯싶었다. 

고주망태가 된 새벽을 마무리해 주었던 케밥집, 감미의 황홀경을 경험했던 바클라바 가게가 보이고, 

보이지도 않는 골목 구석의 만두집도 그려졌다.  

이태원은 아직 어린 요리사였던 시절의 많은 추억들을 품고 있는 곳이다. 



이 식당은 비건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이라 기대가 컸다. 

주문한 모든 메뉴를 비건 옵션으로 선택했는데 

두부가 들어간 그린커리는 생각보다 깊은 맛이 나서 나중에 직접 만들어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까이팟 맷마무어' 는 입에 짝 붙는 자극적인 소스와 크런치한 튀김의 질감으로 콩고기의 이취나 이질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 지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메뉴였다. 

볶음과 튀김요리가 필요 이상으로 달았고 그린 커리 이외의 메뉴들은 태국 음식이라기보다는 중화풍의 느낌이 강했다. 

비건 옵션의 '팟카파오 무쌉' 은 이름에서 보이듯이 카파오 (타이 바질)를 듬뿍 넣어야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데 카파오로 추정되는 건 실처럼 비실비실한 몇 가닥이 전부였다. 

콩고기가 가진 식감의 특성상 다지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채를 썰었을까. 

'쌉 (다지다)'인데 말이다. 이름에서 지시하는 대로만 만들었어도 훨씬 근사한 맛을 내었을 요리였다. 




식사를 마치고 실로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갔다. 

그저 확인차 극장에서 파는 메뉴들을 보니 비건으로서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초가 보이기는 했는데 미국산 옥수수도 나초를 튀겼을 기름의 종류와 출처도 별로 떠올리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나에게 치즈소스 없이 먹는 나초는 말하자면 맨밥만으로 차린 밥상이니 그렇게까지 하면서 심심한 입을 달랠 필요도 없었다. 



좀비 영화가 이제 좀 식상하기도 한데 이 영화는 오히려 재난영화에 가까운 영화여서 나름 재미있었다. 

한국은 이제 좀비까지 셀링 아이템으로 삼은 모양이다. 

K-좀비라니, 좀비보다 더 소름 끼치는 단어다.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이었지만 살랑살랑 불어오는 밤바람이 마음을 움직여

집에서 멀지 않은 포장마차에 들렀다. 



자, 여기서는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역시나 전이다.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도대체 전을 몇 번이나 먹은 건지.

비건살이를 시작한 이후로 술집에 오면 기본 안주를 착실히 먹게 되었다. 

사실 오이에 고추장만 해도 훌륭한 안주가 된다. 오랫동안 이 귀한 안주를 투명한 존재로 취급했다. 


금세 열흘이 지났다. 

아직까지는 격렬하게 고기가 그립지도 않고 비교적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단지 특정 음식 자체보다는 그 음식이 놓인 곳의 정경과 분위기 같은 것들이 한 번씩 그리워지는 것 같다. 

이를테면 머리 고기와 순댓국이 놓인 새벽 두 시의 화목 순댓국이나 

이른 아침 모두의 부은 얼굴을 쳐다보며 말없이 흡입하는 여수 상아 식당의 장어탕이 놓인 풍경과 기억 같은 

것들이 불현듯 심연을 자극할 때가 있다. 


아... 써놓고 보니 이 시기의 나에게는 너무 비극적인 예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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