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Sep 14. 2020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인류세 : 파괴의 역사, 2019 

[11일 차] 


산꼭대기로 이사를 오고 나니 나들이 한 번 하는 것도 전처럼 자유롭지 못해서 

집에 있는 재료들을 뒤져서 요리를 해 먹는 일이 많아졌다. 

비건 살이를 시작한 이후로는 먹는 것에 제약이 생긴 데다가 비건 요리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기도 해서 더욱 그렇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요리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도, 

묵혀두었던 재료들을 털어낼 기회가 생긴 것도 잘 된 일이다. 


주말 요리를 위해 주문했던 비건 제품들이 등장할 시간이다. 

하지만 패키지를 통해 전해져 오는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맛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하더라도 비건햄은 정말 서글픈 맛 - 다시 생각해봐도 이 단어는 너무 적절하다 - 이었기에 잠시 고민한 끝에 감자샐러드에 넣기로 결정했다. 

비건 마요네즈는 맛있었다. 원재료가 다르기에 일반 마요네즈의 맛과는 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부 후기에서의 평가처럼 식물성 재료의 한계를 운운할 수준은 아니었다. 




새봉 감자에 비건 마요, 초당옥수수, 양파, 고추, 목이버섯 피클과 셀러리 피클 그리고 문제의 비건햄까지 

나름 호화로운 구성에 그리운 스리랑카의 커리파우더를 넣어 맛을 더했다. 

건강한 맛?  아니다. 그냥 맛있었다. (언젠가부터 '건강한 맛'이라는 표현에 염증을 느끼고 있어 듣기만 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원래 비건햄으로는 분홍 소시지처럼 구워서 케첩을 찍어먹는 퍼포먼스를 해보고 싶었기에 

슬픈 맛이지만 그래도 정성껏 팬에 기름을 둘러 구워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질감이 굽고 나니 한층 도드라졌다. 


테스트를 마치고 챙겨 온 메밀 치아바타와 우리 호밀 50% 빵, 선비잡이콩 허머스까지 곁들여 유례없이 화려한 

웨스턴 브랙퍼스트가 차려졌다. 물론 아침이니 커피 대신 맥주도 함께. 




밀린 집안일들을 하다 보니 금세 오후가 되었다. 

아침을 거나하게 먹었더니 배도 고프지 않고 몇 시간 만에 또 상을 차리려니 귀찮기도 해서  

며칠 전에 실패했던 '채황'을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봉지 뒷면에 표기된 정확한 물의 양과 조리시간을 지켰다. 

라면은 역시 시키는 대로 끓이는 게 가장 맛있나 보다. 전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그리고 채황과 밀맥주는 그다지 좋은 페어링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며칠 전에 환경영화제가 개막했는데 바빴던 나머지 이번 주 내내 한 편도 챙겨보지 못했다. 

온라인 상영 시간을 맞춰 티비로 인터넷을 연결하여 우여곡절 끝에 상영관에 접속했다. 

장 로베르 비아예(Jean-Robert Viallet) 감독의 '인류세 : 파괴의 역사'였다. 

진보라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달려온 인류의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역사와 그로 인해 발현된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 '인류세'에 대한 이야기. 

플라스틱이, 석탄이, 석유가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지금의 지구는 달라졌을까? 

내 삶도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어느 시대이건 사람들은 어느 시점과 사건의 만약을 가정한다. 

환경이라는 화두 앞에서 때론 이 '만약의 가정' 이 더 절실하고 아련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비건 살이 같은 건 안 하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건 살이를 하면서 몸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이점은 방귀가 늘었다는 것이다. 

어떤 날은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양이 많은데 호기심에 검색을 해보니 나와 똑같은 상황에 놓인 질문자들이 많았고 친절한 답변들과 함께 좋은 방귀와 나쁜 방귀에 대한 글까지 유익한 정보들이 많았다. 

몇 개의 글을 읽으면서 결국 TMI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적어도 이해는 하게 되었으니 당황스러움은 그래도 좀 덜할 듯싶다. 


스스로의 분석 결과 콩은 비건 살이 이전에도 평소보다 잦은방귀의 주범인 듯한데 

어제와 오늘은 유독 콩으로 만든 식품들을 많이 섭취했고 그중에서도 비건햄, 콩불고기와 같이 콩을 아주 그냥 압축시켜서 고기처럼 단단하게 만든 농축 형태로 먹었으니 장의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에는 콩고기와 같은 제품은 삼가해야겠다. 



시도 때도 없이 허기가 지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이다. 

결국 먹는 양도 횟수도 이전보다 늘었고 저녁식사 이후에도 뭔가를 투입해줘야 아쉬움이 덜하니 난감하다. 

그래도 오늘은 한봉에 215kcal 정도 열량을 내는 비건 쑥 크래커 2/3봉과 체리 열댓 개로 선방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도 귀추가 주목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킨포크적 라이프와 순댓국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