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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less conversation Sep 15. 2020

기억력

라야의 어린 스님, 2019 

[12일 차] 


비건살이를 시작한 이후 하나는 집에서 요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달라진 일상의 변화 중 하나다. 

필요에 의해 또는 호기심에 만들어 보게 되는 채식요리 때문에도 그렇지만 주로 사무실에 가지고 나갈 

간단한 점심거리를 만들기 위한 요리이다.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회사 근처에 비건식에 맞는 메뉴도 거의 없을뿐더러 간혹 먹을 만한 음식을 찾아도 

불필요한 조미료 섭취를 하게 될 때가 많아 몸도 마음도 편치가 않았다. 



오늘은 양배추를 쪄서 어제 포장해 온 남은 음식과 함께 아점을 했다.


환경영화제에 신청해 둔 오늘의 영화는 '라야의 어린 스님'. 

부탄을 배경으로 했다는 설명 한 줄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다. 

올해의 위시리스트 중에 '부탄 여행' 이 있었는데 예정대로였다면 이미 다녀왔을는지도 모르겠다. 

환경과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찾기가 애매한 영화였지만 차분하고 좋은 영화였다. 


다른 사람들도 경험하고 있겠지만 타지의 멋진 풍광을 담은 영상을 보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 이내 전보다 더 갑갑해지곤 한다. 

아직 못 가본 곳도 가고 싶은 곳도 많은데 언제쯤 이전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려나 싶다. 



이사 온 지 2주가 다 되어가지만 새 집의 정리는 아직 깜깜하다. 

정리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이케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있을지 검색을 하다가 

'청일집'이라는 반가운 상호를 발견했다. 

청일집은 20대 중후반에 피맛골에서 열차집과 더불어 자주 가던 곳이었는데 그 지역이 재개발로 사라지자 이 쪽으로 가게를 옮겨왔다고 한다. 

청일집이 자리했던 교보문고 뒷골목은 정말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력 메뉴인 녹두빈대떡과 도토리묵무침을 주문하니 익숙한 모습의 기본상이 차려졌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이 곳도 열차집과 마찬가지로 어리굴젓을 곁들여 주는 집이었다는 것을. 

더불어 처음으로 녹두빈대떡 위에 어리굴젓을 올려서 먹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과감한 시도였고 놀라운 맛이었다. 



맛의 조합이 만드는 조화란 무엇인지, 여러 가지 식감과 풍미가 어우러져 하나의 완성된 맛을 이루는 것이 어떤 것인 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옛날 생각에서 빠져나와 젓가락 끝으로 콕 찍어서 어리굴젓의 맛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후회했다. 

연쇄작용처럼 곧바로 뇌가 원하는 어떤 맛이 있었다. 

굴젓과 빈대떡과 소주의 하모니를 느끼고 싶었다. 

먹지 않을지언정 맛보기 같은 건 안 하는 게 나을 뻔했다. 


간혹 비건식에 대해 직업적인 관심으로 접근할 때 과연 젓갈의 맛은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 궁리해본다. 

쌀겨 같은 곡물이나 콩, 해조류 등을 발효시킨다고 해서 동물성 재료에서 얻은 발효취나 풍미를 얼마큼이나 구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지금처럼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닌 엄격한 비건식을 실천하려면 김치도 젓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먹어야 하는데 치즈도 그렇지만 완전한 비건이 되는 상상을 할 때 동물성 발효식품은 나에게 있어 고깃덩어리보다 한참 위의 레벨에 위치한다. 

아마도 나는 평생 그 맛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녹두빈대떡은 추억 속의 맛 그대로였다. 

그동안 나도 맛있다는 것들을 꽤나 찾아먹고 다녔으니 어쩌면 그 시절의 빈대떡보다 맛이 좋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음식에 매진한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묵묵히 불판 앞에 서 계신 주인아주머니의 두툼한 두 손에 자꾸 시선이 갔다. 

건강하게 이어나가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장을 나서는 길에 김밥 한 줄을 샀다. 

문 닫을 시간이라며 주인아주머니께서 아직도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들 중에 하나를 집어 봉지에 넣어주셨다.

1+1으로 주셔도 다 팔고 들어가실 수 있을지 모를 만큼의 양이었다. 

처음부터 두 줄을 살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집으로 돌아와 김밥을 안주삼아 2차를 했다. 

충분히 먹은 것 같았는데 어느샌가 김밥을 해치우고 이케아에서 사 온 크래커에 밤쨈을 발라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딜과 양귀비 씨앗이 함유되어 있다는 크래커의 맛은 발음도 어려운 이케아 제품 모델명만큼이나 생소했다. 

돌이켜보니 이 전에 이케아에서 사 먹었던 어떤 북유럽 전통과자도 나에게 큰 울림을 선사했었다. 

아마도 나에게는 노르딕 음식을 사랑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맛에 대한 사람의 기억이란 이렇듯 복합적이고 직관적으로 감정과 연결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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