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공연제작소 동녁
부산연극제작소 동녘의 <시時답지 않은 이야기>는 용호동 문화의 거리 내 환경을 연극적으로 융합한 장소 특정형(Site Specific) ‘살롱 숏 뮤지컬’이라 할 수 있다. 극단 측에서 이러한 공연형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표현 장소가 건물 외벽의 자연공간과 건물 내 살롱식 카페와 갤러리, 소극장을 공간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요즘 장소특정형 연극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공연되는 추세여서 극단의 탈 극장 중심의 공연형식이 단체의 실험성과 표현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성과물로 보기는 어렵다. 장소특정형 연극은 극과 장소의 관계, 표현의 주제와 소재, 표현자와 장소의 관계성으로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형식만으로 독창적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으로 이번 살롱 숏 뮤지컬은 뮤지컬 형식보다는 넓은 의미로 ’살롱식 장소특정형‘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공연의 형식보다는 극단에서 부제를 달고 있는 ‘시 時답지 않은 이야기’들에 있으며 <시 時답지 않은 이야기>는 매우 단순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의미는 확장된다. 연극인들의 삶의 절규이면서도 시답지 않은 소소한 일상들과 예술가로 살아가는 고뇌를 시와 독백, 세미 뮤지컬 형식으로 자연공간에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방식들을 뮤지컬, 독백, 영상, 움직임으로 담아내면서 여러 시(時)들과 배우로 살아가면서 겪고 있는 내면성의 자기고백 서사가 때로는 시시콜콜한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이면서도 시적인 태도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로 살아가는 고백 서사, 나와 너의 경계에 서 있는 배우의 이야기, 해변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단원들, 연출의 이야기 등 힘들 면서도 조약돌과 같은 한 편의 시들은 시답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에 위로가 되면서도 시 말처럼 살아가려는 예술가들의 고된 삶의 태도들을 담아내고 있다. 2만여 장의 LP판이 보이는 라이브카페 노가다, 막걸리 주점, 책방, 갤러리 석류원, 커피숍 다반(伴),용천소극장 등이이 전통과 현대적인 색채로 골목을 형성하고 있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전체 자연공간을 활용하지 않고 갤러리, 용천소극장, 라이브카페와 골목의 계단 입구의 환경을 활용해 직접 등장하는 5~6명의 배우들이 시답지 않으면서도 시 적인 자기 고백 서사를 공동창작으로 들어내고 있다.
시답지 않으면서도 시적인 자기 고백의 서사와 위로‘
‘시답지 않다’의 낱말 뜻은 ‘ 볼품없어 만족스럽지 못할 때 쓰이는 말이다. ‘시(時)답다’는 대상이나 문장 또는 어떠한 은유의 언어로 형상됨이 시적일 때 쓰인다. 시적인 기준과 판단은 주관적이어서 모호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서정적인 정취를 시적인 구조의 문장을 통해 풍경, 언어, 현상, 인간과 대상 또는 사물과 물질, 질감의 소리를 감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하여 언어적 아름다움과 감동을 자극할 때 쓰인다. 시적 감동에는 슬픔과 비극도, 고단한 삶과 인생의 시간을 관조(觀照)하는 시인의 내면과 바라봄의 태도가 시의 행(行)과 연(聯)으로 함축되는 언어가 되었을 때 음절, 단어, 문장에도 가슴으로 박히는 감동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산연극제작소 동녘의 <시時답지 않은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배우들의 자기 고백 서사는 시적인 언어로 시극이 되면서도 시답지 않은 시시콜콜한 고백의 서사를 관통하는 시간은 시적인 시간으로 귀결된다. 때로는 1연 1행의 ‘잠들지 못하는 어젯밤 너에게, 오늘은 자자’라는 태인의 노래 ‘자자’는 자기 위로의 고백이다.
태인 에게 사랑과 인생의 시간은 ‘일어나면 잠에들고, 해가뜨면 해가지고, 이리가면 저리 갈 수밖에 없는’ 혼돈과 불안의 연속이며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배우)를 확인할 수 없는 불안정한 삶의 시간이면서도 극복해야 할 삶의 방식이다. 태인에게 존재하는 시간은 ‘똑 같은 하루가 돌아와도 맘 편히 자고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의 연속이다. 인생의 시간을 소각(燒却)하고자 하는 절규가 아니라 고된 인생을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의 시간이다. 잠들지 못할 정도로 지치고 힘들어도 태인에게 잠은 여전히 불안전한 목표를 향해 달리고 또 뛰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하루로 돌아오게 된다. 태인이 존재하는 시간의 삶과 박동 소리는 지치고 불완전한 인생의 터널을 달리며 완주하고 싶어 하는 자기 위로를 통한 욕망의 고백이다. 시적인 자기 고백 서사는 배우로 살아가는 아픔과 고뇌, 다른 삶과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배우의 삶이 때로는 역할과 인생, 자신(존재)을 찾아가는 고립된 통증의 시간을 독백의 서사와 시적인 자기고백을 통해 위로받고자 하는 행위로 표현된다. 이 과정을 통해 배우(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치유의 언어로 환유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의 1행 1연은 태인의 노래로 담긴 가사말 보다 관객들이 문화골목 초입에서 극장으로 들어서기 전 커피숍에서 공연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장소특정형 연극성은 배우들이 자연적인 특정 공간에서 장면처럼 전달되고 전환되는 행위의 방식에서 의미보다는 행위가 없는 무대 밖 침묵의 공간에서 주는 자연성이 1연 1행을 잇는 서사의 여백이 된다. 그래서 관객들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듣기 전 문화 골목을 바라보고 걷고, 자연의 체온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간도 시답지 않은 이야기의 시간이다. 흩어져 있던 관객들은 건물 주변에 놓여 있는 사진과 엽서에 적힌 시들을 읽고 자연공간을 이해하게 될 때 인솔자의 안내로 태인의 ‘자자’의 첫 노래를 건물 2층을 이어주는 철재 계단을 바라보며 듣게 된다. 이어 문화 골목 뒤편 외벽 사이로 배우 한 명(연실)이 걸어 나오면 관객들은 갤러리로 이동해 거울 이젤 앞에 앉아 있는 배우를 바라보게 된다. 에린 핸슨의 ‘아닌것’을 시 낭송하고 뮤지컬 레드북의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의 뮤지컬 넘버가 내부 외벽 스크린 영상으로 투사되는데 연실 내면의 모습(자아)으로 비친다.
갤러리에 존재하는 연실에게 삶의 존재는 에린 핸슨의 ‘아닌 것’처럼 불투명한 미래와 인생이다. 삶의 존재는 입고 있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도, 머리 색깔이나 이름도 삶의 위선으로 치장되어 있는 내 것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버리고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더 많은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그 아름다움을 잊고 살아가는 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위로를 받게 된다. 자기 치유의 시적 언어는 레드북의 노랫말처럼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충분해 괜찮아 이젠‘ 처럼 자기 존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자아로 극복되는 것이며 비로소 이젤 투명유리로 그려진 자기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만큼 시는 불완전한 인간의 존재와 삶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치유됨으로써 절망도, 절규도, 불안함과 삶의 피로도 ‘내가나는 아닌 것’의 불완전함의 연속된 시간으로 채워져도 그것은 에린 핸슨 의 시구처럼 내가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1연 2행까지는 두 배우 (태인과 연실)의 삶과 존재의 불완전함을 자기 고백적 서사와 시로 치유하는 방식이었다면, 2 연부터는 삶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2만여 장의 LP판이 보이는 라이브카페 노가다로 이동한 관객들은 텅 빈 공간에 작은 탁자에 앉아 있는 여배우(지은)를 마주하게 되고 배우는 이젤 위에 놓인 거울을 보며 분장 중이다. 날것의 자연적인 공간은 배우의 삶의 공간으로 전환되고 공간 분위기는 배우의 인생이 연속되는 삶의 공간이 된다. 마치 배우의 고백적 서사는 LP판의 소리를 제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음악처럼 들려주는 것처럼 자신이 공연한 정의신 작 < 반딧불이>의 임순진 역할 장면을 스쳐 가듯 보이고 이어 김기택의 ‘껌’을 낭송하는데 껌은 배우 인생의 표상이 된다.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은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 자국들의 흔적들을 지우고 몸속으로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의 형태로 창조해야 할 배우의 고된 역할의 시간이다. ‘내’가 ‘너’가 되어야 하는 배우의 인생과 시간은 뭉개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김기택 시인의 껌처럼 찍힌 인물의 이빨자국을 버리거나 지우고 지워, 살육의 기억을 깨우며 배우의 이빨자국으로 몸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야 할 고통의 시간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은 여전히 선명한 이빨 자국으로 동그란 모양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간의 연속들이다.
3 연부터는 용천소극장으로 이동해 진행되는데 배우로 살아가는 시답지 않은 소소한 일상의 인터뷰를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준다. 한 배우는 바닷가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에 이무일 시인의 ‘조약돌’을 낭송하고 편채원의 ‘누구나 그렇게 서른이 된다’등이 무대 후면의 영상과 인터뷰 형식으로 배우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로 채워진다. 마치 무대의 여백을 채우는 것처럼. 시 낭송으로 현재 시간을 은유할 때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않은 길’의 시 말이 노래가 되고 리듬에 한 배우의 움직임이 무대로 그려진다. ‘가지 않은 길’처럼 배우의 존재, 존재하기 위한 시간은 ‘돌아 올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계속 가야만 하는 길‘로 되돌아온다. 그 길은 시인의 말처럼 때로는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야 오랜 세월이 지나고 훗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던 기억을 환기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적게 간 길로 나아가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삶의 위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2행의 은성과 연실의 대화처럼 ‘가끔 흔들려도, 힘들어도, 행복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수고한 오늘은 아름다움 너의 오늘이 될 수 있다’는 위로로 살아갈 수 있는 태도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연제작소 동녘 배우들의 시답지 않은 자기 고백적 서사의 이야기들은 연과 행으로 이어지는 시적인 삶이자 인생의 시간의 연속들이며 시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며 위로이자 치유의 행위이다. 때로는 김기택 시인의 ‘껌’처럼 또다시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 자국들의 흔적들을 지우고 몸속으로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만들어 가야 할 무대의 삶은 연출이 낭송한 오르텅스 블루의 ‘사막’이 된다. 너무 외로워서 때때로 뒷걸음질로 걸으며 모래에 찍힌 자기의 발자국을 보는 고립된 외로움의 시간이면서도 다시, 한 발을 내딛고 걸을 수 있는 것도 외롭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의 공연제작소 동녘의 <시時답지 않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