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이와 멀어진 이에 대하여
불특정 다수와의 만남이 일상이 된 지금, 나는 매번 같은 질문들과 마주한다. 새로운 사람과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얼마나 오래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가. 그 관계의 유효성은 무엇으로 판단하고, 그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인가.
40대를 바라보는 지금,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과거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절실한 의미로 다가온다.
나이를 먹으면서 마주한 변화 중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인연에 대한 기대가 무뎌져 버렸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에게 선보일 자아를 구성하고, 상대의 취향을 가늠하며 나를 조율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이제는 하나의 의무처럼 느껴진다.
20대의 나에게 '새로운 만남'은 곧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했다. 우연한 시선의 교차, 예상치 못한 대화의 전개, 서로의 내면을 조금씩 드러내는 과정 자체가 주는 전율이 있었다. 그 시절엔 만남이라는 사건 그 자체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새로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부터, 또 다른 관계의 좌표를 그려야 한다는 피로감까지—모든 것이 예견된 수순처럼 느껴진다. 만남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그 한계와 종료 지점을 가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관계가 갖는 패턴을 너무 많이 목격해버린 탓일까, 아니면 그 이면에 도사린 공허함을 미리 간파해버린 때문일까. 정확한 원인은 모호하다. 다만 내 삶의 반경 안에 새로운 변수를 들이는 것이 점점 더 큰 용기를 요구한다는 사실만은 명확하다.
근 30년을 함께한 오래된 친구들이 있다. 우리 사이엔 신기할 만큼 닮은 구석이 없다. 성장 배경도, 성향도, 심지어 말하는 방식까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과의 관계만은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내며 지속되고 있다.
특별한 조건이나 계산 없이 함께 걸어온 세월이 있고, 각자의 궤도를 그리면서도 때때로 교차하는 순간들을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그 소소한 교환과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해의 지도를 조금씩 완성해왔다.
생각해보면, 이 친구들과는 달콤함과 쓰라림, 심지어 어색함까지도 함께 견뎠다. 진정한 공명이나 동질감을 느끼지 못할 때조차도, 서로를 배려하고 관계의 경계를 조율해나가는 섬세한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서투르고 때로는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우리는 함께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그 긴 시간 동안 인간관계가 주는 복잡함을 체득했고, 동시에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도대체 어떤 우연이 우리를 엮어놓았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인연이라는 것의 불가해함 앞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시절인연'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채 다가오는 새로운 관계들에게 문을 닫기 시작했다. 찰나의 만남으로 스쳐 지나간 이들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더 이상 아쉬움이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는다.
언젠가는 각자의 궤도로 돌아갈 사람들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이미 멀어진 이들에게 정중한 작별을 전하는 것조차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로 여겨진다.
그렇게 남겨진 이들과 멀어져간 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부인하려는 그 아쉬움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