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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Dec 02. 2023

다발성경화증 9년차 연대기

자가면역질환_몸은 마음의 도구다

3년 전, 나는 제주로 숨어들었다.


2020년에 제주 중문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홍승은 작가가 쓴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라는 책을 읽었다. 언어가 없던 사람에게 없던 언어를 꺼내 줄 만큼 강력하고 귀한 책이었다. 22년에는 참여연대에서 진행한 그의 글방에도 참여했다.


홍승은 작가와 함께하는 글방에서 썼던 글을 옮겨왔다. 이 글이 누군가에 읽힐 거라고 기대 하지는 않지만, 사적인 아카이빙 이랄까.

불과 1년 반 전의 나는, 그 1년 전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고,

1년 반 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또 다시 극적으로 달라져 허탈하리만치 놀랍다.


매일 5 정도의 에너지를 갖고 살던 내가 2년 반 만에80의 에너지는 족히 갖고 살아간다 느끼고 있다. 2년 반 전에는 늘상 격한 피로와 함께 살았으나 요즘은 늘상 활기차다.  모두 성장할 거라는 믿음과 감사, 운동 덕분이다.


아, 무엇보다 중요한 것, 인공식품, 정제식품 먹지 않기. 당류 제한하기.

이 세 가지 덕에 삶은 놀랍도록 빠르게, 크게 변화했다.


1.믿음과 감사

2.운동(달팽이 속도로 늘려가기. 몇년 단위 생각.)

3.인공식품,정제식품 안먹고 채소 섭취하기.


약간 사이비 같으려나. 사이비 글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다. 다만,

우리나라 사회가 아주 잘 돌아가는 훌륭한 사회라 믿는 분들은

글을 읽지 않으시는 게 내면의 평화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앞으로 옮겨 올 글을 쓰던 시절의 나는 마음이 아팠다. 1년 반이 지난 지금은 확실히 보인다. 여전히 어떤 약도 먹지 않고 있고, 몸은 계속 좋아지고 있다. 의사는 내가 약을 안 먹는지 모르고.1년 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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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팔을 앞을 향해 뻗어 보실래요? 그리고 굽혀보세요.

이제 주먹을 쥐어주세요.


자, 이제 이 주먹은 우리의 뇌이고 팔목은 척수입니다. 뇌와 척수를 잇는 신경이 명령을 전달해야 우리들이 몸이라 부르는 녀석이 움직이겠죠? 그러니까 팔 다리 눈 코 입 목구멍 같은 근육들이 말이에요.


이 신경을 감싸고 있는 얇은 막을 자기 몸 스스로가 공격하는 병도 있더라고요. 전선은 쥐에게 갉아먹히면 혼선이 생기죠. 기계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을 거고요.


제 뇌와 척수 신경도 마찬가지에요. 언제 어떻게 혼선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원인도 불명이죠. 평균적으로 발병 15년 즈음 지나면 보행 보조용구를 사용하게 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지팡이나 휠체어 말이에요. 그 때서야 저는 ‘공식적인’ 장애인으로 인정 받겠죠.


시신경에 문제가 생겨 한쪽 눈이 안 보이기도 했고, 사시도 경험했어요. 지금은 나았지만 시력은 급속도로 떨어졌어요.

몇년 간은 눈동자에 불투명한 얼룩이 묻은 듯 했고, 동체시력이 거의 상실되어서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는 잘 못봐요. 오른 다리는 자주 힘이 풀려 땅에 끌리는데, 그것 때문에 넘어지는 일에는 도가 텄어요. 많이 넘어져 보니까 이젠 안다치게 넘어지는 방법도 익혔어요.


이 모든 것들의 까닭은 신경을 시나브로 고장내는 제 반려병에 있어요.

증상 완화제는 있지만 치료약은 없고요.

증상 완화제의 성분을 검색하니 가죽을 가공할 때 곰팡이가 피지 않게 사용하는 약품 성분이랑 같더라고요. 한번 먹을 약 안에는 가죽 가공 성분 2400 배의 약품이 들어가요. 이 약은 하루에 두번씩 매일, 평생 먹어야하고요.


우와. 대단하죠. 부작용이 적어 안전성이 ‘검증’ 됐대요. 글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내 몸이 언제까지 이 약품을 견뎌낼 수 있을지 궁금해요. 병원에선 스트레스를 피하라고만 해요. 그런데 지금 저한테 조금씩 멈추지 말고 노력하면 나아질거라 확신에 차 말하는 당신도 제겐 스트레스에요. 그러니까, 그냥 저를 냅둬 주실래요?’

언젠가의 나는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려병과 동거 7년 차에 접어드는 나는 이제야 누구에게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병의 이름을 알게 된 초기에는 그렇게 말 할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어렵다. 외국의 다발성경화증 아, 내 반려병의 이름이다. 이하 MS. 환자 커뮤니티에서 보아하니, 남한테 싫은 소리 잘 못 하는 사람들이 자가면역질환에 걸릴 확률이 더 높으며 MS는 감정을 조절하는 뇌에도 영향이 있기에 더욱 그런 상황을 잘 못 견뎌낸다고)


설명을 하기엔 내 스스로도 아는 것이 지나치게 적었다. 주변 누구에게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의사 조차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의사는 피 검사를 통해 혈액 수치로 약이 잘 들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해마다 찍는 MRI 영상으로 병의 상태를 살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근육이 위축될 수 있는 병의 특성 상 큰 장애가 아닌 작은 불편이라 해도 재활 운동은 필수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것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격한 운동은 피하라’, ‘위험한 건 삼가라’, ‘약 잘 먹어라’ 등의 조언만 할 뿐이다.

아직 내 몸은 혈기왕성 한데, 오른쪽 몸의 신경만 공격한 질병 탓에 이삼십분만 활동적으로 움직여도 오른 몸의 힘이 빠져 젓가락질 조차 힘들어지곤 했다.


여럿이 같이 일을 하고 식사라도 할 때면 이미 지쳐있던 나는 오른 손을 이용해 젓가락은 커녕 숟가락으로 비빔밥을 비비는 것 조차 버거웠다. 덩달아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꺼리게 됐다. 나는 자꾸만 숨어 들었다. 병과 함께 쪼그라드는 삶을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정신이 버려진 신문조각 처럼 구겨지고 있었다. 타인의 이해에 가 닿지 않는 몸에 대한 설명은 내 삶의 반경을 <병>이란 틀 속에 가둘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타인의 반응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나는 고장난 뇌 때문인지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 탓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연민 혹은 불쾌함이 어정쩡하게 뒤섞인 말과 표정에 온 정신이 뒤틀리는 듯 했다.


한 사람의 존엄이 훼손 되고 있었단 걸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온 존재를 뒤덮는 피로를 감내하며 일반인들과 함께할 때,

타인이 은근히 하대 하는 걸 감지하곤 했다. 사람들은 귀신 같이 아프거나 약한 상태의 사람을 알아챘다.

몇 만년 간 이어진 수렵채집 시절 부터 기본 프로그램으로 저장된 생존 본능의 일환인 걸까. 그냥, 그들은 자연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밀한 약자 식별 레이더에 발각될 시, 내가 충분히 포함될 수도 있었을 누군가의 연인 후보에서 혹은 채용 후보 에서의 제외로 나타났다. 어느새 감내하고 있는 하대로 나타나기도 했고, 소리없는 멀어짐으로도 나타났다.


함께 할 수 있었을 활동과 업, 만날 수 있었을 연, 친구가 썰물 처럼 빠져나갔다. 삶의 둘레가 좁아진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내게는 사랑했던 것들의 그림자만 물이 빠져나간 뻘 처럼 남아있었다.


첫 진단 이후 5년 즈음이 흐르자 몸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다 알 것 같았다. 몸의 격변을 지나며 믿음의 힘은 희한한 곳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예를 들어 내 몸은 약을 먹지 않고 요가로써 병을 근본적으로 몰아낼 수 있을 거라는 굳센 믿음 같은 것, 내 몸은 유달리 강하다는 믿음 같은 것 … 돌이켜 생각하니 허무맹랑한 믿음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때의 내겐 믿을 수 있고 헌신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고 해도.


약을 먹지 않아도 의사는 알아채지 못했다. 혈액 수치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하루 두번 먹는 약이 컨디션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듯 했다.

내 임의로 일년 정도 약을 먹지 않았고 자신만만하게 MRI 상태 체크를 했던 어느날, 의사는 뇌 위축이 진행 됐다며 뇌의 크기가 10% 이상 줄어든 사진을 내게 친히 보여줬다.


그 후 나는 (기분 탓 이겠지만) 뇌가 쪼그라드는 느낌을 실제로 감각 했다.(사실 뇌에는 감각세포가 없어 고통과 위축감각을 느낄 수 없다)

오랜 우울증을 앓았다. 확실히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몸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정말로 ‘뇌가 작아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너져 가는 몸을 지켜보며 살아가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어보였다.


뇌에 병이 생겼다는 첫 확진의 충격 만큼이나 막대한 충격이었다. 첫 확진을 받고 넋이 나가 병실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며 내다봤던 어둡고 외로우며 우울하고 습한 장면이 현실이 되어 들이닥친 것이다.


나의 반려병, ‘서양 풍’ 이라고도 불리는 MS는

당장에 나를 죽이지 못한다.

그저 천-천히 신체 능력을 앗아갈 뿐이다. 노년이 아닌, 가장 젊은 시절에.


병을 확진 받을 무렵까지 내 주변엔 언제나 담배와 술이 있었다.

하루에 한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으며 한 주에 사 일은 새벽까지 술자리를 지켰다. 병을 얻은 후 의사는 술과 담배를 하지 말 것을 강조 했기에 그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쯤에서 나는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페이스북에 나의 몸 상태를 알리며 술담배를 권하지 말아달라고 쓴 것이었다. 스스로 하지 않았으면 될 것을.

고립으로 향하는 첫 엑셀레이터를 밟는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지인들은 ‘아프다며, 힘내라’, ‘나도 어릴때 아팠거든, 병원에서 치료좀 받고 쉬면 시간이 다 해결해줄거야’, ‘어, 얼굴 좋아보이네, 다 나았어?’ 같은 말을 했다. 그 때 마다 나는 굉장히 불쾌하거나 불편한데 이를 어떻게 표현 해야할 지 몰라 그저 수동적 공격성을 띈 채 차오르는 스트레스에 허우적거려야 했다.

문제는 원인 불명인 이 병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로 꼽힌다는 것이다.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간 관계에서 멀어져 스스로를 고립 시켜야 했다. 술과 담배를 끊는 것에도 도움이 됐다. 의도치 않게 반 강제적으로 주워 든 고립은 정해진 수순 처럼 우울로 이어졌다.

언제나 몸 상태를 정확히 설명 할 언어가 부족했다. 오래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설명을 제대로 하려하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데,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 그럴 여유는 없었고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가까스로 낯설고 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뭐야 죽을 병도 아니네’ 누군가는 지나치게 가볍게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지나치게 무겁게 받아들였다. ‘밥은 먹을 수 있어?’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마치 죽을 사람을 대하는 듯한 사람도 있었고, ‘천천히 운동하면 좋아질거야’ 치료와 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경증의 허리 디스크 정도로 생각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는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그 쪽 역시 몹시 외로웠다.


내 반려병의 가장 고약한 점은 시간의 흐름과 관련이 깊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체가 점점 더 불편해져 삶이 이그러진다. 수많은 선례에 따르면 말이다.


면역세포의 셀프 공격이 더해질 수록 뇌와 척수에 남는 공격의 상흔(병변)은 쌓인다. 영구적인 손상을 남기게 된다. 영구적으로 손상된 신경과 연결된 부위의 몸은 움직이기 어렵게 된다. 이런 과정을 수십년에 걸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환자들의 정신에도 덩달아 병이 찾아올 수 밖에 없다.


웅덩이에 빠진 삶이 혼란 속에 발버둥 칠 때 동년배 친구들은 매년 눈에 띄게 사회적 위치가 바뀌었다. 극적인 대비는 비참을 불러오기 쉬웠다. 게다가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거의 없다 할 수 있었으며,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는 더할나위 없이 비참했을 거라는 생각에 자주 빠졌다. 자기혐오와 연민의 줄다리기를 몇년 간 이어왔다.


해가 흐를 수록 의사가 말해주지 않는 감정, 관계, 음식, 환경 등 피해야 할 것들이 혼자만의 몸 사전에 쌓여갔다. 그것들은 삶을 지켜주는 동시에 삶의 반경을 좁혀나갔다.

확진 후 이년이 지났던 봄의 일이다. 오분 정도 온탕에 몸을 담갔다. 뜨겁도록 따스한 물에서 나올 때 다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일어섰으나 중심이 잡히지 않아 서있을 수 없었다. 몸의 힘이 다 빠진 채 늘어져서 네 발로 기어서 나와야 했다. 다행히 일정 시간 휴식을 취하니 진정이 됐다. 몸 사전은 음식 뿐 아니라 수 많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무리해서 움직이면, 유제품을 섭취하면, 정제된 밀가루를 섭취하면, 단 것을 많이 먹으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담배를 피우면, 과도한 알콜을 섭취하면,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뜨거운 샤워를 하면, 30분 이상 집중을 하면, 한번 지친 뒤에 또 행동하면 …’

이미 신경에 생긴 손상은 회복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의 신경이 고장나면 그와 연결된 또 다른 신경을 만든다. 하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사회는 그 시간도 제도도 공간도 내어주지 않았다. 기다림 없이 빨리 빨리를,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착취할 '정상'의 몸을 추구했을 뿐이다. 장애와 정상 사이에는 불편이 있고, ‘불편한’ 상태의 사람을 위한 언어와 제도는 너무나 궁핍하다.


고된 일을 끝마친 뒤 인사하는 동료에게 ‘수고하셨습니다’ 지친몸을 통과하며 나온 어눌한 소리로 답할 때, 그들의 눈동자엔 낯섦과 약간의 연민과 불편함이 뒤섞여 있곤 했다. 7년 동안 거의 모든 노동에서 감지한 눈빛. 자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듯한 눈빛.


섣불리 꺼내든 연민은 오히려, 정상인도 장애인도 아닌 나를 고립되게 할 뿐이었다.

​병에 관해서 다른 누구보다 임상 정보가 많고 여러 현상을 잘 이해하고 있을 만한 사람 조차 나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한 자세로 있으면, 게다가 집중 까지 하고 있으면 몸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 되거나 힘이 풀려 오른 손이 자동차 핸들에서 미끄러지곤 했다.


그 즈음 ‘위라클’ 유튜브 채널에서 하반신 마비 장애인 ‘박위’가 운전하는 영상을 시청했다. 운전 보조용품을 지원받아 운전 할 수는 없을까 의사에게 장애인 증 발급에 대해 질문했다. 의사의 답은 이랬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환자분을 장애인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왜 환자분 스스로가 장애인이 되고싶어하냐’ 라는 것이었다.


누가 장애인이 되고 싶댔나. 정상인이 운전하듯 운전하는 게 위험하니까, 걱정되니까 이런 불편은 제도적 보호를 받을 순 없는지 물어본거지. 그 후 나는 의사와의 대화를 최대한 줄였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의사 폴 칼라니티가 말한

‘의사는 환자들이 어떤 지옥을 지나고 있는 지 모른다.’는 말이 절절히 와다핬다. MS의 학계 권위자라 불리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느꼈다.

의사도 이럴진데 장애의 정도를 판가름 하는 공무원들은 내 몸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애초에 이해하려는 마음을 꺼낼 수가 있을까. 과연 그들이 내 몸의 언어화 과정을 감내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고, 내 몸이 장애로 분류되는 건 과연 맞는 일 일까.


정상과 장애를 나누는 건 있음과 없음 뿐일까. 나는 하루에도 몇번 씩 움직일 수 있다가도 없는데, 그건 어디에 속해야 할까.

내 스스로 그들을 이해하려는 편이 차라리 편했다. 생각에 우겨넣은 이해의 파편들은 마음 속에서 분노와 우울감으로 변형되는 듯 했다.

내 말이 이해로 가 닿지 못하는 경험을 할 때 마다 사회에서 박탈된 내 정신은 정말 괜찮은 걸까, 혼자 쓸쓸하게 시들어 갈 미래의 장면이 종종 떠올랐다.


“한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면 다 할 수 있어.”

“아프다 아프다하면 더 아파져. 그러니까 아파도 아프지 않다 생각하고 참고 버텨.”

“왜이렇게 살이 빠졌어”

“아프지 말고, 힘내자”

“맥주 마셔도 괜찮아? 다 나았어? 언제 다 나아?”


가까운 친구에게, 연출에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누군가에게, 일년에 한번 정도 보는 사람들에게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살이 빠진 게 아니라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줄곧 말라왔다.

‘아픈애’로 상정하고 나를 바라봤기에 내 마름 부터 눈에 띄었던 게 아닐까. 나는 언제 병이 악화되어 아프게 될지 모르지만, 일상 생활에 고통을 느끼진 않는다.

다만 몸의 균형감각이 약해졌다. 동체시력이 손상돼 움직이는 걸 보는 게 힘들다. 가끔 다리가 저려 쥐가 나 잠에서 깨어난다. 원활하지 않거나 참을 수 없는 생리적 배출 현상으로 화장실을 자주 간다. 감당이 어려운 피로까지 더해져 불편하게 살아갈 뿐이다.

아프지 않은데 아프지 말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고,나는 아직도 대답을 머뭇거리는 중이다. 주변인들이 으레 내뱉는 가벼운 호의의 말들이 쌓이며 나는 가끔 적의를 느꼈던 것도 같다.

대다수 사람들은 질병의 상태에 끝이 ‘있음’을 상정 해놓고 대화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과 나누는 첫 인사는 ‘몸은 좀 어때’ 였다.


‘사실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줘도 될 만큼 내 몸은 괜찮아요, 다만 24시간 함께 다니는 반려병이 있고 다소 불편할 뿐이지요.’

간혹 진심을 입 밖으로 내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대방의 아쉽고 속상하며 불쌍하게 날 바라보는 석연찮은 시선과 마주하게 됐고, 그런 상황을 만든 스스로를 벗어던져 내다 버리고 싶을 만큼 병든 내가 혐오스러웠다.


질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픔의 면사포’ 같은 것이 씌워져 있는것 같다. 새하얀 것만 보면 뭐든 묻히고 싶어하는 사람 처럼, 사회는 언제나 쾌유를 종용했다. 애초에 내 병은 사라지지 않는 종류의 것인데, 평생 여기에 있는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끝까지 ‘얼른 나아져야지!’ 라고 했다.


MS, 다발성경화증이 완치 됐다는 사람은 소문으로도, 세상 정보 다 있다는 구글 에서도 나는 7년간 본 일이 없다.

정당의 종류가 국민의 힘과 더불어 민주당만 있지 않듯 아픈 몸과 정상인 몸만 있지 않은데. 다수의 정당이 존재하는데, 다른 몸들이 많이 있는데.

나의 반려병 MS는 우리나라에서 이만명에 한명 꼴로 발생한다고 한다. 국내엔 수천명이 있고, 세계적으로 200만 명이 넘게 있다고 한다. 점점 더 감정적으로 안전하고 안정된 유년 시절을 보내는 이가 줄어가고, 가공식품이 넘쳐나 건강한 먹거리를 쉬이 구하는 일도 줄어간다.


모든게 연결된 세상은 늘어난 연결 만큼 스트레스도 많아진다. 희귀한 자가면역질환, 난치병이 계속해 늘어나고 있다. 질병이 극히 흔해 졌는데, 언어만은 아직 건강이라는 이름의 네버랜드에 머물러 있다. 소독도 하지 않고 가려놓은 상처는 더 덧났던 기억에 씁쓸하다.


살기 좋은 세상은 상처가 안 생기는 사회가 아니라, 상처가 생겨도 ‘괜찮은’ 사회이다.

장애의 가림막, 불편의 가림막이 사라진 세상은 썩 멋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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