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컨텐츠는 어떻게 변화할까
때는 코로나 공포가 피크를 치던 4월 중순, 과제에 치여 혼이 나간 몸을 이끌고 극장을 이틀 연달아 찾았다. 평균 1주일에 한 번 꼴로 극장을 가던 나도 올해에 들어서는 첫 감염자가 발생하기 전인 1월 초가 마지막 극장 나들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관객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한 CGV에서 <인생영화 기획전>과 <히어로즈 기획전>을 동시에 열어 버린 게 아닌가. 이틀 동안 <라라랜드>와 <로건>을 감상했다. 이번 방문은 유독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라라랜드>의 상영관 안에는 관객이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진기한 풍경에 신남 반 죄책감 반의 기분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나왔었다. <로건>은 관객들이 더 많긴 했지만, 아이맥스 관에 걸린 히어로물에 어울리는 관객 숫자는 아니었다. 사실 극장 관람객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미 “우리 집 가서 같이 넷플릭스나 볼까(Netflix and chill)?”가 서구권에서는 하나의 밈으로 쓰이고 있지 않은가. 점점 더 컨텐츠 소비에 있어 장소는 제약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기이할 정도로 극장 이용인원이 많아서 이번 코로나 사태가 유독 큰 타격으로 다가오는 것일 테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가 종식되고 국내 극장 이용객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다만, 지금처럼 극장이 강제적 비수기인 상태에서, 관객들이 컨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의 변화에 있어 가속도가 붙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소비 방식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컨텐츠 자체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이 점에 대해 생각해볼 가치는 분명히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극장의 ‘블록버스터화'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점이다. 21세기 초유의 전염병으로 극장을 기피하던 사람들도 다시 방문하게 만드는 게 <히어로즈 기획전>이 아닌가? 물론 이는 코로나로 인해 개봉이 예정되었던 영화들이 개봉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과거의 명작들을 재개봉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거꾸로, 이런 긴급 상황일수록 히어로물과 같은 대형 영화가 확실한 타개책임을 방증한 것이다. 국내 영화 배급사들의 투자 패턴을 봐도, 대규모의 제작 및 마케팅 예산을 들여 확실한 흥행을 보장할 수 있는 작품들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극장은 점점 더 소수의 대형 영화들만을 위한 독점 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역시 이미 진행되어 가는 현상이었다. 진짜 중요한 지점은, ‘비극장용' 영화의 미래다. 여기서, ‘비극장용' 영화가 ‘저예산' 영화, 즉 인디영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CGV의 아트하우스관에서는 지금도 굉장히 다양한 저예산 영화들이 개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트하우스 영화들은 어떤 의미로는 특별취급을 받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대형 영화들과 경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트하우스라는, 작지만 확실한 관을 확보함으로서 나름대로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여기서 비극장용 영화란 대형 블록버스터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덩치 큰 첫째와 예쁨 받는 막내 사이에 끼인 둘째 아이를 의미한다. 위기에 놓인 건 둘째 아이들이다.
지금으로서 예측해 볼 수 있는 변화는 비극장용 영화의 제작 예산 감소와 함께, 이들이 OTT 컨텐츠로 편입될 가능성이다. 제작사들의 투자 성향이 보수적으로 변하면서 작품별 제작비 분배의 양극화는 심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마케팅비도 감소될 것이기에, 이런 영화들은 대형 극장에 걸리기보다 넷플릭스나 통신사 OTT를 주 배급원으로 삼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앞에서 이런 잠재적 변화를 위기로 표현하긴 했다. 그리고 대형 극장의 배급 기회가 박탈당한다는 점에서는 위기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양가성이 있는 문제다. 앞서 언급했듯이, 관객들이 컨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은 더 이상 장소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대형 극장만이 관객들에게 노출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면 전혀 다른 문제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극장 개봉을 하면 대형 영화들의 스크린 독점에 의한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OTT 플랫폼은 더 많은 잠재적 관객에게 노출될 기회다. 예전에는 극장에서 먼저 성공한 영화가 내려오고 나서 OTT에서 공개되어 추가적인 수익을 올리는, 극장을 첫 관문으로 삼는 듯한 양상을 보였지만, <사냥의 시간>같은 영화를 보면 더 이상 그렇지도 않다.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넷플릭스 독점 스트리밍을 선택한 이 영화는 190개국에 동시 배급되었다. 고전적인 배급 메커니즘을 유지해야할 큰 이유 하나가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런 변화는 중간 규모의 영화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해야할 필연적인 방향일지도 모른다.
이런 배급 플랫폼의 변화는 컨텐츠 자체의 변화, 즉 스토리텔링 방식 자체의 변화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한 장, 한 장 손으로 넘겨보던 출판 만화가 웹툰으로 넘어오면서 스크롤링(scrolling) 방식으로 바뀌고, 그에 따라 종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 아래로 길게 늘어져 내려오는 새로운 미학적 형식이 등장했다.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 컨텐츠가 공개되면서 영상 컨텐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2013년 공개된 넷플릭스 독점작 <하우스 오브 카드>가 있다. 시리즈의 제작자 데이빗 핀처가 인터뷰에서 말하길, 관객들이 대형 스크린이 아닌 모니터나 스마트폰으로 이 작품을 관람할 것을 알기에, 촬영 중 미세한 초점 오류가 나더라도 극장용 영화만큼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 덕분에 촬영 시간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했다. 참고로 데이빗 핀처는 할리우드에서 ‘미친 디테일'의 완벽주의자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거장이다. 그는 또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시즌 전편을 통째로 공개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호흡'의 전권을 넘겨주는 대신에, 기존의 2시간짜리 영화에서는 절대 시도할 수 없는, 13시간에 걸친 긴 호흡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이런 플랫폼의 변화는 컨텐츠의 제작 환경뿐만 아니라, 관객이 컨텐츠를 체험하는 방식의 변화와 그로 인한 미학적 체험의 변화를 시사한다.
‘13시간짜리 영화'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 ‘극장용' 컨텐츠가 아닌 ‘비극장용' 컨텐츠를 두고 그것을 영화 혹은 드라마로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이제는 무의미함을 의미한다. 오히려, 비극장용 컨텐츠는 사람들이 집에서, 근처 카페에서, 출근길을 오가는 대중교통 안에서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더욱 개인적이고 비격적적인 미학적 경험(informal aesthetic experience)이 되면서 거꾸로 극장용 컨텐츠가 더 격식적인 이벤트(formal event)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극장 방문의 경험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언급한 ‘테마파크 경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20세기 미국의 대형 영화 스튜디오들이 장악하던 미국의 극장에 대항마로 ‘브라운관 내러티브’가 미국인들의 안방을 점령했었다. 21세기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상당히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의 말마따나, 지금은 넷플릭스 작품들이 시상식을 싹쓸이해도 할 말이 없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아마존, 애플 등에서 줄줄이 독자적인 OTT 플랫폼과 자체 제작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한국도 왓챠 플레이나 통신사 기반의 iptv 플랫폼들이 강세다. 이들 플랫폼 역시 언제 자체 제작 컨텐츠를 들고 나오더라도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변화를 지켜보고 있으면, 극장이라는 공간을 소수의 대형 영화들에게 빼앗겼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씁쓸한 현실이긴 하다. 표면적으로 멀티플렉스의 다양성을 잃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비극장용 컨텐츠에 의한 변화가 장기적으로는 더 다양한 작품들의 생태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객과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만큼 그들에게 더 소소하고 개인적인 ‘소확행’의 경험으로 다가갈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