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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Aug 10. 2021

전쟁은 시작되었다


Horst P. Horst

mainbocher corse

corset for vogue. 1939

1939년 8월, 이차 세계 대전의 이브, 이날 호스트 P. 호스트는 파리 샹제리제의 보그 스튜디오에서 '메인보처 코르셋'을 촬영하고 있었다. 험버트 험버트 만큼이나 공상적인 이름을 가진 호스트 P. 호스트는 이날의 사진촬영이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임을 묘하게 직감했다.


사실 당대 코르셋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기껏해야 중세의 구닥다리 유물이라거나 일부 건강치 못한 데카당트의 괜한 멋부리기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거기엔 코르셋의 과도한 착용으로 장기손상을 입었다는 소문도 한몫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보그지에 코르셋 모델 사진이 등장하자 대중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호스트 P. 호스트의 사진 속에서 코르셋을 입은 모델은 등을 돌린 채 나무선반에 기대어 있다. 끈을 채 조이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가슴에 파묻고 있다. 그녀를 에워싼 거대한 침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녀를 감싼 공기엔 이율배반적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영원한 아름다움과 찰나적 기쁨, 균형과 붕괴의 교차, 에로틱함과 수줍음, 거친 도발과 섬세한 우아함이 빛과 그림자처럼 절묘하게 그녀를 조각해 놓은 것이다. 어쩌면 그녀 등 위에 난 작은 점이 푼크툼처럼 우리의 안식을 깨트렸는지도 모른다.


뒷모습. 그녀의 뒤틀린 등뼈를 따라 등푸른 옛 조상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조여진 매듭에서 탯줄처럼 길게 뻗어나온 끈은 미궁에 빠진 자들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코르셋. 이 에로티즘의 갑옷이 누군가 불을 당겨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다이나마이트의 도화선이라면?


전쟁은 시작되었다.


1939년 9월호 보그 독자란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불평은 이제 그만. 첫째 이 현대적 코르셋은 디자인이 꽤 잘 빠졌다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짜 문제는 편안함을 얻는 게 아니라 요부(siren)의 몸매가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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