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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으로 우리나라 망한다고?

90년대생 탓 그만하고 진짜 이유를 봅시다.

by merryblack

저출생은 문제가 아니다.

최근, 한 포털에 올라온 애를 낳지 않는 90년생들이 문제라는 글의 댓글창에서 갑론을박이 오갔다. 전세계 꼴찌로 떨어진 현재의 저출산율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시급한 문제인양 한숨을 내쉰다. 출산을 하지 않는 90년대생, 젊은 여성들을 탓하는 목소리도 많다. 저출생을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싶었다.


저출생을 왜 두려워하는가?

저출생을 왜 두려워하는가? 집도 없고 취업도 힘들며 양질의 일자리도 없다고 느끼는 청년으로서, 인구가 줄어들면 주택 공급은 남아돌고, 경쟁이 치열했던 일자리 시장은 숨통이 트일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애낳는 게 애국', 다둥이 부모를 보고 '애국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저출생의 결과로 "국력이 약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노동력이 경제의 유일한 성장 동력이던 시대는 지났다. 인구가 많다고 경제 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여성의 조기입학이 저출생 해결할 것'이라며 성차별적 관점을 드러낸 국책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조차도, 오히려 인구가 줄면 삶의 질이 향상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실상 저출생은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기 보다는 '장시간노동, 집값, 가부장제, 높은 경쟁율, 소득격차' 등 다양한 문제들의 결과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바로 돌봄의 부족이다. 노인이 되었을 때, 나를 부양할 돈과 사람이 없다는 현실. 외롭게 늙어죽을 것.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공포인 것이다.


문제는 돌봄 노동

저출생 이슈가 수면위로 오르기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불평등, 집값문제, 장시간노동, 여성차별, 능력주의 등 다양한 사회 문제들은 수면아래에서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중 핵심인 돌봄노동은 단언컨대 단 한번도 해결된 적이 없었다. 만일 지금 이순간 중년 여성들이 돌봄노동을 파업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더러움 속에서 허우적대다 죽음에 이를 것이고 분명히 이 나라는 마비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보이지않는 노동을 하는 이 여성들에게 기대어 살고 있다. (어느 노동이 더 중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년여성의 노동이 많이 가려져있고 저평가되기 때문에 강조하여 하는 말이다)


과거에는 이 돌봄의 부담을 여성을 가정에 묶어둠으로써 해결했다.

저출생의 문제를 두고도 "여성의 학력이 높아져서", "여성 인권이 올라가서", "여성들이 소비만 하고 결혼을 안 해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가치관이 변해서" 같은 말들이 국가기관으로부터 나오고 심지어 "여성의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정책이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기존의 재생산문제(출생, 돌봄)를 '여성억압'을 통해 유지해왔음을 반추할 수 있다.


돌봄 노동을 다시 여성에게 떠넘기고 싶고. 여성을 다시 가정으로 가두려는 욕망은 국가의 '여가부 폐지'정책, '페미니스트 혐오와 낙인'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더이상 고분고분히 수발을 들어주지 않는 여자, 다른 여자들까지 깨어나게 해서 함께 자신에게 반격하게 만들 페미니스트가 무서운 것이다.


'가치관의 변화'때문인지 '고학력'이어서인지, 그 이유가 뭐든지간에, 이제는 여성들을 가정으로 가둘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 이유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있다. 딸들은 집에서 엄마가 겪은 것들을 지켜보며 자랐다. 엄마들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헌신했지만, 그 대가로 인정이나 존경이 아니라 무시와 폭력을 받았다. 그런 엄마가 나에게 남긴 교훈과 바램('너는 나처럼 살지마라')대로, 높은 교육을 받고 가치관을 교육받으며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경로를 밟는 것이 딸들이 겪는 역설의 사랑이다.


여성들이 집단적 기억상실을 겪지 않는 이상 , 다시 여성을 가정으로 가두려는 시도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

혹자는 여성을 가정으로 가두기 위해 "아이와 함께하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로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을 돈에 미친 냉혈한이나 파렴치한으로 매도한다.

여성들이 삶과 관계에서 오는 소중한 가치를 모를 리 없다. 다만, 여성이 비교하는 것은 '나의 행복'과 '육아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과 '돌봄 노동을 하지 않는 남편의 행복'이다. 이 불평등한 현실에 장시간 노동과 높은 집값, 빚, 가난, 불안이 겹치면 과연 누가 그런 억울한 일을 자처할 수 있을까? 오직 '돌보는 남편'을 만난 여성 뿐이다.


저출생의 해결책: 남성이 부엌으로 들어오도록 온 사회가 힘을 합쳐야 한다.

저출생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돌봄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관련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실질적인 현금지원이나 공교육 강화 정책에 젊은 부부들은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답변한다.

하지만 정희진선생님이 말했다. 근본적으로 필요한 변화는 '남성들이 부엌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남성들이 가정 내 돌봄 노동을 분담하지 않는 한, 저출생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 한명을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남성이 부엌에 들어오도록 온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노동시장은 육아휴직을 보장하고 노동시간을 줄여 육아시간을 보장해야 할 것이며, 교육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육아에 대해 공통의 책임이 있고 차별없는 관계맺기가 중요함을 알리는 성평등적 커리큘럼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기 위해 임금이 실질임금으로 올라야 하고 집값도 현실적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남성들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사회, 이것이 저출생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같은 맥락에서 결혼하고 싶은 남자, 연애하고 싶은 남자는 돌봄 능력을 길러라. 남성이 여성을 구매하여 살았던 오랜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성공하여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보살핌이니까.


아마 현실적으로 남성 권력이 주되게 자리 잡고 있는 시장과 정치권은 죽어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면 진짜 죽는다. 자살률 1위와 출생률 꼴찌는 맞닿아 있다. 이 사회가 소멸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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