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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ryblack Apr 17. 2022

4월 16일. 어떻게 지겹습니까?



살면서 죽음을 목격하는 일은 많지 않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우리는 죽음을 목격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수많은 참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세월호참사는 '전원 구조'라는 오보와 그 이후 실시간 보도, 그대로 배가 가라앉는 모습, 그리고 304명의 실종자, 수습자 등에 관한 뉴스를 꾸준히 지켜보며 마음 졸이고 눈물을 흘렸고

그 일련의 이어진 감정 때문에 나는 그 바다 한가운데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목격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 세월호참사 1주기 때 광장을 걸었던 기억, 2주기 때 시민사회단체에 속하게 되었던 연장선에서.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국가가 달라야 한다는 말은 지키지 못했지만,

적어도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나는 달라졌다.



그리고 8년이 지난 2022년, 4월 16일

나는 안산의 기억식에 처음 함께 했다.

그날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피해가족이 더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은 소리와 함께 깨졌다.


기억식이 진행되던 화랑유원지의 건너편으로 혐오 세력이 마이크와 앰프를 챙겨와 시끄러운 소음으로 방해했다.

그들은 고작 3-5명 정도 되어 보였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는 기억식 무대에서 송출하는 소리만큼이나 컸다. 경찰은 소음에 대해서 아무런 저지도 않았다.

그들은 마이크를 들고 피해가족이 지겹다거나, 수많은 다른 참사들과 호국열사들에 대해서는 기리지 않으면서 세월호는 기리는 이유가 뭐냐고 묻거나, 4.16연대나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의 소속인의 개인정보들을 읊었다. 또 큰 소리로 한국 남성가수 발라드를 틀기도 했다.

그래서 피해 생존 학생 애진님이 편지를 낭송하는 동안, 백그라운드로 애절한 사랑노래의 발라드 음악이 깔렸다. 수진 아버님이 연설을 하는 동안에도 동시에 혐오 세력이 질러대는 탓에 그 문장이 섞여 이상하게 들렸다.


 기억식이 그대로 진행되는 듯하더니 한 피해가족 어머니가 눈이 벌겋게 젖은 채 혐오세력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윤희 어머님이 그 어머니를 따듯하게 안으면서 말리셨다. 그 마음 다 안다고. 하지만 가만히 참아보자고.


가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은 나였다. 나는 도저히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서 있을 수 없어서 그들을 보러 건너편 쪽으로 기웃거리기도 하고, 옆에 같이 온 분께 저 앰프 하나 부시고 철창 들어가 볼까 하는 호기로운 소리를 내뱉기도 하고, 너무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정말 너무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어떻게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일부러 상처를 입히기 위해 저런 짓을 할까?


내 심장의 가운데에 떠있던 인류애의 모양에 금이가고 일그러져서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부서진 조각들이 위에 걸려서 위액이 올라오는 듯이 쓰리고 목구멍이 아팠다.


그들에게 감정이 없다고 하기에는, 인간이 슬프고 애도해야 할 때, 더 슬프게 더 아프게 하는 방법을 아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감정을 너무 잘 알았다.


유독 세월호 가족에 대한 혐오는 다른 이슈보다  극심하다.

'시체팔이'라는 말을 한다던가

'왜 수많은 죽음 중에서 하필 세월호'라던가

'정치공작'이라던가

'생명안전공원은 납골당이다'라던가

'지겹다'던가,

‘이제는 더 할 수 있는 게 있냐'던가


세월호참사는 다른 참사들과 '국가'의 대응면에서 달랐다. 다른 참사들도 국가의 안전관리 소홀과 기업의 탐욕에 의해서 벌어졌고,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나 4.16연대, 4.16재단도 함께 싸우고 있다.


하지만, 참사 이후 국가에 의한 폭력면에서 세월호참사는 다른 참사와 다르다.

국정원과 군 조직에 의해 유가족이 사찰되었고,

절대로 개인이라면 알 수 없는 유가족의 정보들이 보수언론과 혐오 세력에게 전달되었고,

일베나 보수집단은 단식농성 앞에서 '폭식 투쟁'등과 댓글 조작에 가담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저 보수집회의 생각과는 다를 거라 기대했다.

아직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임기가 끝나지도 않았고 해경 지휘부도 전원 무죄판결을 받은 상황에서 ‘지겹다'던가, '이제  밝혀지지 않았냐'던가 하는 말을 일반 대중이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4월 16일 당일에도 진보 언론사들은 세월호 관련 기사를 메인으로 보도하지 않았고, 길거리의 사람들도 노란 리본을 달지 않았다.


이제는 잊힐 만도 한, 그런 일이 된 걸까?

그래서 잊지 말아 달라고 설득하고, 애원해야 하는 일이 된 걸까?


꽃다지의 노래 <내가 왜>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내가 왜 세상에 버림받은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가족들은 예상이나 했을까?

그리고 나 또한 예상이나 했을까?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외치고 시위를 벌이는 나로 살아가게 될지 10대의 나는 예상이나 했을까?

귀찮은 존재가, 투정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구체적이진 않지만, 지금 이대로가 지속된다면 언젠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막기 위해, 고의가 아니어도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라 생각했을까?


세월호 다큐 영화 '세월'은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예은의 아버지 유경근 님이 '세상 끝의 사랑'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각종 재난 참사의 유가족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예은 아버님은 씨랜드 참사의 유가족 아버님께 죄송하다고 말한다.

"지난 참사들을 그저 뉴스로만 기억하고 있었다”고. “이런 마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죄송하다"고.

 또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와 광주 5.18 민주화운동으로 가족을 잃은 가족들을 만나러 다 같이 광주에 간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내가 너의 마음을 다 안다"라는 말에 국가의 사찰 등으로 잔뜩 경직되어 있었던 세월호 가족들이 맘을 풀고 어머니들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은 정말 겪어야만 아는 문제일까?
그래서 겪지 않은 혐오 세력은 그렇게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사실 "당신의 가족이 그렇게 당해봐야, 그런 행동을 안 할 것이다"라는 말을 그 사람들에게 침처럼 내뱉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너무너무 분노하기 때문이다.


예은 아버님도 영화 '세월'에서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욱욱 올라오지만, 절대 그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아무리 미워도 남은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더 진심이라는 걸 안다고.

가족들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나의 진심은,

다시는 불행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내가 타인의 불행을 보고 불안하지 않기 위하여,

그래서 그 불안이 나의 영혼을 잠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싸운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어떤 몸으로 태어날지 모른다.

여성으로 태어날 수도

백인이 아닌 몸으로 태어날 수도

장애인의 몸으로 태어날 수도

퀴어의 몸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어떤 형태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죽을지도

지하철에서 화재가 나서 죽을지도

불이 났는데 옥상이나 비상구가 막혀 죽을지도

오늘 출근한 회사건물이 드라이비트로 포장되어있었고 어쩌다 불이 나서 죽을지도

아니면 세상의 부정의함과 무정함에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달아 죽을지도 모른다.


이 태생과 죽음의 뽑기는, 죄도 벌도 아니다.

아무도 감당해야 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 간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주어져야 한다.

혹은 적어도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싸움이 보장되는 세상이 주어져야 한다.


나는 오늘도 아픈 말을 내뱉는 그들을 이해하고 싶어 했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과정을  반복한다.


윤 당선인은 알지 몰라도

나는 알 도리가 없는 ‘국민통합’이라는 걸

언젠어렴풋이라도 어림 가능한 어른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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