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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ryblack Nov 18. 2023

저는 그저 카메라에 불과한걸요.

나는 충분히 좋은 사람인데 나를 좋아할 수 없다면.



이 글은 조금 자기 고백적이다. 그리고 오글거린다.

하지만 나와 같이, 본인이 충분히 좋은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본인을 사랑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진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글을 남긴다.




최근, 타인을 위한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을 시작한 이유를 알기 위해 다사다난했던 약 육 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의 가까운 친구가 많이. 아팠다.

나는 나의 아끼는 친구를 돌보기로 결심했다. 오랜 기간 우울증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내가 그 친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우울증의 신체화 증상을 이겨내고 단약을 했던 우울증 극복의 경험으로 그 친구를 잘 이끌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과 노력, 경제적 지원을 시작하자 얼마만큼의 돌봄이 옳은지, 얼마만큼의 경계가 옳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수많은 여성학계가 돌봄 사회, 돌봄 경제 등 돌봄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실질적으로 돌봄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하는 경제적 지원은 타당한지, 내가 할 수 있는 격려 혹은 개입은 어디까지가 옳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하는 친구의 상태를 보며 내게 돌봄은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그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상담을 시작했다.


그러나 상담은 점점 나에 대한 상담이 되었다.

나는 아직 돌봄을 하며 자해충동이 일어나는 만큼 힘든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돌봄은 내게 힘든 게 아니라고 말했다. 상담사는 고개를 저으며 그때가 되면 너무 늦다고, 내가 우울증을 겪었던 그 이유부터 파고들려고 했다.

 파고들수록,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일상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었지만, 아직 나의 본질적인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과 함께 내 삶의 일대기를 테이블 위에 늘어보았다.

내가 처음 빚을 냈던 이유가 타인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였다는 것과, 목돈이랍시고 모은 돈은 대체로 모두 남을 위해 쓴 것. 나의 활동들이 대체로 타인을 돕기 위해 시작했다는 점들. 지금 돈을 모으는 이유도 가족이 위급할 때 돈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점과

나는 언젠가 자연사가 아닌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이고 어떤 방법으로 죽든 상관없다는 것.


나는 사람들 앞에 죽음과 삶에 연연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나를 과시해왔다.

동시에 내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털어내며 타인을 위해 움직여왔다. 내 손에 무엇이 남는 게 싫었다.생기면 무조건 없애려고 했다.

소비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았다. 그게 내 삶일지언정.


나는 얘기를 잘 들어주고, 현명한 조언을 제안하는 내 역할을 찾아다녔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내가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나를 갈고 닦는 데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종종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집중하는 사려 깊은 사람들을 마주치면, 신나게 자기 비하와 자기 조롱으로 나를 털어놓으면서, 동시에 그들 앞에서 내가 사라지길 바랐다.

"왜 나는 나를 배려하주는 사람들 앞에서 혼자 나를 남김없이 계속 털어놓고, 결국 발가벗은 기분을 느낄까?, 왜 끊임없이 나를 가벼운 사람, 아무래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드는 걸까?"

자기 비하를 늘어놓거나, 대화를 점유하는 나, 자의식이 과잉하는 나를 혐오했다.


이 공간에 내가 없었으면.

딱 눈알 두 개와 귀 두 개만 있었으면,

이 완벽한 사람들에게 내가 누가 되지 않았으면.

그래서 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내게 기대하지 않았으면.

내가 그저 카메라에 불과했으면 하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나는 나를 끊임없이 죽이고 덜어내는 꿈을 반복해서 꾸어왔다.

'저는 종종 당신이 바라보는 제가 여기 없는 상상을 해요. 그게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애인에게 말을 했을 때, 애인은 '그럼 저는 누구랑 대화해요'라고 물었다.

답은 하지 않았다.


남에게 내가 텅 빌 때까지 퍼줄 때마다 내게 남는 건 행복이나 만족감이 아니라, 공허함이었다. 그리고 남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감이었다.

남과의 약속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시간뿐만 아니라 책임, 서비스에 대한 약속)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나를 대하듯이) 그들과의 약속을 후순위로 두고,

그래서 계속 사람들을 실망하게 만들었다.


목돈을 어떻게 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지.

나는 나의 중요한 것들에 대한 선택을 남에게 외주 했다. 그 결과에 대해 만족도 후회도 아닌, '괜찮아'로 연명했다.

속으로 괜찮지 않은 나를 발견할 때면

'왜 만족하지 않는 거야 이 배부른 녀석아. 너의 선택에 책임을 지라고!' 하며 나를 탓하고 비하했다.


상담선생님은 물었다.

빚을 내면서까지 타인의 빚을 갚아주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시간을 챙기지 않으면서 타인의 시간을 메워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희생하면서 그 결과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에 대해서,

왜 그런 거냐고.


답은 쉬웠다.

내가 나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이유는 나를 혐오해서였다.

나의 생존가치를 증명할만한 것이 없었다.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어떠한 철학도 답하지 못한다.


니체를 만나고 이제는 그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에게 힘에의 의지가 있다는 것도 안다. 비교적 나는 의지와 에너지가 강한 사람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매일매일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의지와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동시에 '생존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병행하면, 그 사람은 타인의 욕구를 들어주고 싶다는 (나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이 된다.





상담을 지속하며 TCI라는 성격기질 검사를 했다.

검사결과는 다소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책임감과 자기 수용, 타인 수용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왔다.


사실 타인 수용이 낮은 건 알고 있었다.

나는 타인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고, 그래서 실망하지도 않아 왔다. 인생에서 어떤 결과를 마주하든 (사회 탓을 할지언정) 남탓을 하지 않는다가 나의 1번 가치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비난해 왔다.


하지만 책임감이 낮은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타인과 약속을 만들면 그걸 어떻게 해서든 해내려고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잘은 못해도 최선은 다하려고 했다. 하지만 부족했던 걸까, 혹은 부족했다고 내가 날 평가했던 걸까.


자기 수용이 낮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타인에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에게 적용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자기 수용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인정하고 나를 믿는다는 것은 곧 내게 어떤 기대가 있다는 것 아닐까?


낮은 세 가지 성격 부분을 연결해 보니 나는 새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마치 타인에게 실망하지않기 위해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래서 기대하지도 않고, 그래서 실망하지 않으려고 하며 나를 지켜왔던 건 아닐까?


즉, 나는 나를 책임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자기 수용과 책임감이 낮다는 것은 곧, 나를 책임지지 않고 싶다는 욕구의 결과가 아닐까?





수많은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아도, 나에게 와닿지 않았었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나를 우선하는 삶'에 대해서 인터뷰하듯이 질문했다.

“네가 생각하는 ‘나를 우선하는 삶’은 뭐야?”

 한 친구는 '비행기 사고가 날 때 우선 자신이 먼저 마스크를 쓰고 아이에게 씌우는 것처럼,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먼저 챙기는 것'이라고 했다. 나의 고찰이 시작되기 전에는 이 말이 그냥 '당연하고 좋은 말'이지만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 어려운 말이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글들을 봐도 '어쩌라고, 그니까 왜 사랑해야 하는 건데'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다.

나는 나를 우선하는 삶, 나를 사랑하는 삶을, '어차피 찾아오는 내일의 나를 회피하지 않는 삶'으로 대체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나처럼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내 취향이 아닌) 사람에겐 어쩌면 나와 같은 접근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책임들을 회피하기 위함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자기혐오적 말하기를 했던 이유는 나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사회적 관계에 책임을 지지 않고자 함이었다.나는 내가 사라질 때까지 스스로를 비우는 나, 경제적으로든 선택기회를 삭제하는 방법으로든 실제로든 자해하는 나에 중독되어 있었다. 앤서니 기드슨에 의하면 중독은 회피에서 비롯한다.

내가 나라는 사람을 건사할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내 존재를 부정해 왔다.


왜냐면, 나를 건사한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늙어 살 집 하나를 장만하기 위해 노력할 것.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차별과 소외를 견디며 어쨌든 밥벌이를 한다는 것.

똑똑하지 못한 머리로 약은 이 세상을 헤쳐나갈 것.

내일이 또 온다는 것.

그것만으로 질식할 것 같다.


내일의 삶을 꾸릴 책임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시간과 약속으로 나를 메웠다. 그 약속들이 범람하면 나는 지쳤고,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을 했다.

자책은 다시 자기 비하와 사라지고 싶다는 욕구로 연결됐다. 사라지고 싶다는 욕구는 다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로 나를 채우게 만든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어 왔다.





선순환은 시작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중심으로 약속과 시간을 정비하고, 남과의 약속을 덜어내고, 남을 실망시킬 가능성을 소거하고, 그러면서 나에 대한 신뢰를 다져갈 수 있을까?


하지만 어쨌든 비로소

나는 나를 스스로 사랑할 책임을 직면했다.

이 직면은 곧 서른 번째 생일에 나를 위한 첫 번째 선물이다.


사랑이라고 하길래 첫눈에 반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어떤 사람은 당연스레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채 태어났을 수도 있겠지.


근데 한눈에 반할 만한 사람이 아니어도 스스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은 능력의 문제이며 기술의 영역에 가깝다고 말한 것처럼,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인내하고 반복’해야‘ 할 ‘실천’에 가깝다는 점에서, 지지부진하고 어렵고, 그래서 재밌는 과정이 될 수고 있겠다는 기대도 든다.


더 이상 내가 타인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자의식 과잉하지 않고, 사라지길 원한다며 울지 않기 위해서. 나의 희생보다 그저 나랑 놀고싶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보다 지쳐 떠나는 일이 없게 만들기 위해서.



- 나를 중심으로 시간과 약속을 재편하고

- 나와 시간을 오래 보내고

- 나의 욕구를 우선할 이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가치관 안에서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아마, 이게 유일할 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지 않는 이상 내일은 찾아오니까.

내일의 나를 회피하지 않기 위해.

나를 우선하는 삶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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