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피셜 "덕 토크"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에서 조건적 환대와 절대적 환대를 설명하며, 윤리의 조건은 절대적 환대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 환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다. 상대의 신분도, 이름도 묻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누구에게나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는 행위와도 같기 때문이다. (데리다도 이걸 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불가능함을 알고 그 사실에 동요되고, 노력이라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불가능해 보이는 절대적 환대가 실현되는 유일한 순간이 있다. 바로 아이가 태어날 때이다.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 절대적 환대를 경험한다. 바깥세상과 만나는 순간 그의 “탄생”이 받아들여진다. 나는 “바늘을 든 소녀”를 보며 이런 나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깨달았다. 윤리가 완전히 삭제된 시절이 있었고, 태어나는 아이들 마저 환대받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배경은 세계 1차 대전 직후의 덴마크다.
주인공 카롤리네는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방세가 밀렸기 때문. 전쟁터로 나간 남편은 실종 상태라 그녀는 정부에서 제공하는 “과부 수당”도 받지 못한 채 겨우 굶어 죽지만 않을 만큼의 박봉을 받으며 옷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절박함을 기회로 삼아 공장주는 카롤리네를 착취해 원치 않는 임신을 시킨다. 이어서 그녀는 버림받는다. 지옥 같은 세상에 태어나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될 불쌍하고, 짐 같고, 암 덩어리 같은 아기를 없애기 위해서, 카롤리네는 따뜻한 물에 몸을 이완시킬 수 있는 목욕탕에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닿는 긴 바늘을 숨겨 들어간다. 고통 속에 물속에 잠겨버린 그녀를 발견한 것이 다그마르 부인이었다. 그녀는 카롤리네의 피를 지혈시키고 부축하여 목욕탕을 빠져나온다. 아기를 낳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자신이 선하고 부유한 부모를 찾아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롤리네의 유일한 희망처럼 보이던 다그마르 부인의 모티프가 되는 인물은 최소 9명에서 최대 25명의 유아를 살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실존 연쇄살인범 다그마르 오버비다. 카롤리네는 다그마르의 집에서 인생에서의 첫 평안함을 느끼지만, 곧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은 점점 메울 수 없이 커져 결국 다그마르는 경찰에게 체포된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팔뚝만한 길이의 바늘로 자신의 아래를 찌르는 카롤리네의 모습도, 솜인형 보다도 더 쉽게 신생아의 목을 꺾어버리는 다그마르의 살인 장면도 아니다. 다그마르의 최후 변론이 진정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자신이 “구원”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겁쟁이들, 자신의 잇속만 생각하는 부자들, 정부 놈들이 애써 외면한 사회의 최약자들을 위해서, 아무도 하지 못한 짓을 자신이 용기 내어했다고 말한다. 모두가 생각은 하지만, 불경스러워 입밖에 내지도 못하는 그 행위를 자신만이 직접 했다고.
물도 나오지 않는 집에서 살면서, 만삭의 몸으로 감자를 옮기다가 쓰러진 채 공장 노동자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다리를 벌린 채 아기를 출산해야 했던 카롤리네의 삶. 그런 그녀에게서 태어난 더 연약한 아기.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카롤리네”들. 다그마르는 이 사회는 아이도, 아이를 낳은 여자도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할 수 없다고,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 지옥에서 아이를 구원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외침은 살인자의 자기 합리화나 자기변명을 넘어서 사회적 위선, 괴물적인 사회의 구조에 대한 폭로를 담고 있다.
카롤리네가 직접 경험한 지옥도를 1시간 반 동안 달라붙어 보게 된 관객들은 쉽게 다그마르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 그녀의 말은 너무 현실적이다. 마치 모두가 느끼고 있지만, 초자아에 의해 검열되어 무의식에만 잠재해 있던 생각을 다그마르가 뱉어내고 있는 듯했다. 다그마르를 처벌함으로써 사회는 정말 정의로워지고 정화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함께 만든 지옥의 책임을 다그마르에게 떠넘긴 채, 그녀를 처단함으로써 해소와 해방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마치 일시적으로 사회의 질서가 회복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면서. 다그마르의 “궤변”에 대한 윤리적 반박이 고작 “그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어. 살인은 언제나 악이야.” 같은 말 밖에 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진정한 공포다.
그래도 영화는 아주 미약한 희망을 한 줄기 제시한다. 카롤리네는 남편 피터에게 돌아간다. 전쟁에서 얼굴 반쪽을 잃은 피터는 PTSD를 앓으면서도 마약(아편)에 의지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아기를 사랑하고, 아내를 안쓰러워한다. 멀쩡한 얼굴로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그의 얼굴–눈도, 턱뼈도 없는 그의 외형은 작품 마지막에서는 더 이상 괴물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의 얼굴은 사회적 폭력을 겪고 살아남은 윤리적 얼굴이 된다. 마치 호손의 “주홍 글자”에서 헤스더가 가슴에 달고 다니던 "A"처럼. 괴물적 얼굴은 오히려 사회의 폭력의 증거이자 그의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얼굴이 된다. 그리고 카롤리네는 그런 피터와 함께 다그마르의 딸(사실 정말 딸인지 알 수는 없지만)을 입양한다. 카롤리네는 남편 피터와 함께 다그마르의 딸에게 절대적 환대를 베푼 셈이다. 영화의 끝에서 나약하지만 분명한 윤리적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회복의 욕망이 느껴지는 이유다.
+차갑고 쓸쓸하고 냉정한 영화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려서 흑백 영화라는 자각이 없이 보게 되었다. 방금 감독 이름을 확인하려 검색했다가 흑백영화임을 인지했다. 그 정도로 영화가 슬프다.
++ 여성의 몸과 아이의 출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배가 불러오는 표식. 아이를 낳는 고통. 몸 밖으로 아이가 밀려났고, 그 아이는 이미 죽었음에도 딱딱하게 뭉치는 가슴과 흘러나오는 젖. “모성 신화”가 저주가 된 카롤리네의 삶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임신과 출산, (거시적으로는) 사회적 재생산의 능력이 여성에게 권력이 아닌 “형벌”로 기능하는 사회적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한다.
+++ 현대사회에서는 아기의 출산은 절대적 환대가 실현되는 유일한 순간이라고 썼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뒤늦게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접하게 되는 영아 살인사건 (심지어 대부분 친부모에 의해)이 떠올랐다. 1919년에 비해 지금은 절대적 빈곤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카롤리네처럼 내일 잠잘 곳, 먹을 것, 입을 것, 씻을 물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 그런 악마 같은 선택을 하는 영아 살인범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본인들이 카롤리네처럼 비참하게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들이 느끼는 상대적 빈곤의 고통이 카롤리네가 겪은 절대적인 지옥과 비슷하다고? 만약 그렇다면, 그 지옥은 대체 누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가, 어느 부분까지 사회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카롤리네는 임신으로 인해 방직공장에서 해고당한 후 점점 불러오는 배를 안고 감자를 나른다. 사실, 감자라고 위에 썼는데 감자인지 양파인지 석탄이지 모르겠다. 해당 장면을 3번 다시 돌려봤는데 여전히 모름.
바늘을 든 소녀 (The Girl with the Needle, 2024)
감독: 매그너스 본혼
배우: 빅토리아 카르멘 손느(카롤리네), 트린 디어홈(다그마르)
수상: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비영어영화상, 골든 글로브 비영어영화상,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후보.
주홍 글자 (The Scarlet Letter, 1850)
작가: 너새니얼 호손 (Nathaniel Hawthorne)
환대에 대하여 (Of Hospitality, 2000)
작가: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