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더 이상 외국인처럼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외국어에 대한 생각

by 호지차와 낙지좌

나이가 지긋한 외국인 교수가 입을 열자 유창한 한국말이 쏟아져 나온다. 자신의 이름과 함께 왜 한국에 터를 잡게 되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나의 경험에 비춰봐서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외국어로 말을 하게 되면 목소리의 톤이 올라간다고 한다. 교수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는 그가 지금 얼마나 한국어에 능숙한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말은 자기소개에 뒤이어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에 대한 주제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저는 한국인처럼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외국인으로서 한국어를 배운 사람처럼 말하려고 합니다.'


외국어를 오래 배우면서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모름지기 그 나라 사람처럼 말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외국어를 진심으로 배우다보면 인격이 살짝 바뀌기도 한다. 일본어로 말하는 나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더 정중해진다. 외국인인 것이 들키면 안 되는 사람들인 것처럼 우리는 마치 그 나라 사람 같은 자연스러움을 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도 어느 순간 내가 일본어를 할 때 나의 말투, 생각,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당연히 나의 말투, 생각, 분위기에는 평생 살지 않았던 일본적인 느낌이 적을 것이다. 그 미묘한 문화적 차이는 똑같은 문장과 억양으로 구사를 할 때도 분명히 티가 날 것이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의미를, 그저 다른 언어로 표현할 뿐인데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나? 그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란 참으로 희한한 것이다. 보통 의미가 있고 언어는 그 의미를 감싸는 포장지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나는 회사가 싫어'라는 말을 한국어 포장지로 감쌀 때도 있고, 영어 포장지로 감싸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언어는 마치 연잎에 싸놓은 음식처럼 그 포장지로 인해 말의 맛이 조금씩 바뀐다. 전하고자 하는 바는 같을 수 있으나 뉘앙스가 바뀐다.

그리고 말은 생각보다 표현이 고정적이다. 그래서 언어를 배울 때 상황과 함께 통째로 외우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칭찬할 때, 욕할 때, 일을 맡길 때 그 나라만의 맥락이 담긴 고유의 대본이 있다. 그 대본을 그대로 읽고 따라하는 것이 외국어를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다.


그러나 그 나라만의 맥락은 당연히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끔 외국어를 말하다보면 연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의미와 표현이 각자 주도권 싸움을 하는 듯이 느껴진다. 표현이 우위에 있을 때, 즉 그 나라의 맥락에 흠뻑 젖은 외국어를 할 때 나는 가끔 연기자가 된 느낌이 든다.


나는 30대 일본인 여성 직장인이 될 수 없다. 외국인 교수가 자신과 나이가 같은, 예를 들어 한국인 60대 아저씨처럼 말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모르긴 몰라도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 뻔하다. 그것은 이미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닌, 한국인 아저씨를 연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내가 30대 일본인 여성의 말투를 그대로 구사한다면 그때부터는 내가 아니라 하나코씨가 되고 만다.


어떤 직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외국어를 구사해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통역 같은 것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외국어를 배운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나와 그 언어의 합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어에 끌려가 연기자가 되지 않도록, 어디까지나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말할 뿐이고 그것을 (설령 어색하더라도) 단지 외국어로 전달하는 것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