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생각에 대한 생각만큼은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by 호지차와 낙지좌

1. 생각은 꼬인다

조급함은 누구든 이견없이 부정적으로 보는 자질일 것이다. '그래도 조급한 것이 좋은 면이 있다'라고는 좀처럼 말하기 어렵다.

어린이집에서 주기적으로 벼룩시장을 열곤 했다. 누군가 코난 비디오를 가져온다는 얘기를 듣고 하루종일 그 비디오를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투니버스가 나오지 않는 깡시골이라 명탐정 코난은 볼 수가 없었고 친척 네서나 가끔씩 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을 소장할 수 있다니. 달리기 시작신호를 기다리듯 벼룩시장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렇게 시작하자마자 뛰어나가 코난 비디오 2개를 무사히 집에 데려올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티비에 앉아 코난을 틀자, 희한하게 생긴 코난이 티비 안에 들어앉아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미래소년 코난>이었다. 경험으로 배운다는 점에선 그만큼 값진 경험도 없었을 것이다. '조급하면 안 된다.' 우리는 습관처럼 조급해지기 때문에 이처럼 머리가 띵할 정도의 실수를 겪어야 한다. 그래야 동물적인 감각으로 조급함을 경계할 수 있게 된다. 한 번 생각할 것을 두 번, 그리고 세 번.

대충 이렇게 생긴 애가 코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함은 사춘기의 시작과 함께 대차게 꼬여버리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나'에 대해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이 바로 사춘기이다. '나'에 대한 생각도 예외가 아니다. 그 끊임없는 검열과 고민과 불안에 파묻혀가는데 신중히 생각을 하다보면 진흙에 서서히 몸이 빠지듯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나는 그 복잡한 생각을 머리를 쓴다고 착각했다는 점이다. '생각이 많은 편'이라고 할 때 나는 나의 두뇌를 계속 가동하는 상태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 생각이 많다는 것은 무척 고역이면서 동시에 내가 그래도 머리를 쓰고 있다는 이상한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바로 이 모순된 인상으로 인해 나는 한동안 나의 생각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춘기부터 20대가 지나면서까지도. 생각은 갑자기 무례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존재였다. 그것이 대체 왜 이러는지 알고싶어 책에도 기웃대고 상담에도 기웃댔지만 대개의 경우 그냥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아 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보면 된다.


2. 세 개의 문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된다. 생각에 대한 생각만큼은 기계적이고 빠른 결론을 내기로. 이제 나는 생각이 찾아오면 잠시 대기시킨 뒤 세 개의 문 중 하나를 통과시킨다. 이때 '내가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내가 내 감정을 너무 무시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같이 방문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단호히 지시한다. 닥치고 있으라고. 그 세 개의 문에는 각각 감정, 걱정 그리고 이성이 쓰여있다.

(안타깝게도 이성이 찾아오는 일은 별로 없다. 초대해야 겨우 발걸음을 한다.) 대부분은 감정과 걱정 앞에 줄지어 서있다.감정과 걱정을 분리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문장이 나에 대한 평가과 비난으로 끝나면 감정이라고 여긴다. 대표적으로 이런 것이다.

'내가 오늘 나도 모르게 한숨을 자주 쉬었는데 자꾸 이러는 거 너무 별로인 것 같아'
'오늘 몸무게를 쟀는데 별로 떨어지지 않았어, 그런데도 너는 도대체 왜 자꾸 먹는게 생각나는 거야'

주로 나에 대한 직접적인 생각과 평가가 있으면 그것은 감정이 생각의 탈을 쓴 것이라고 판단한다. 불안과 공포가 생각의 입을 훔쳐서 말을 하는 것뿐이다. 만약 나에 대한 직접적 평가가 없는 생각이라면 나는 그것을 걱정으로 분류한다. 간단히 말해 '갑자기 몸이 아픈 것 같다, 내일 일어나기 어려울 것 같아' 이것은 걱정이다. 그러나 '갑자기 몸이 아픈 것 같아, 이렇게 몸 관리도 제대로 못하면 앞으로 어떡하려고 하니' 이건 감정이라 여긴다.


그런 다음에는 대체 어떤 감정 때문에 그런 것인지 차분히 들여다본다. 이렇게 말하면 멋지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대신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채면 '응~ 아니야~조용히 해'라고 말하며 입을 다물게 한다. 감정을 억누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붙잡고 들여다보곤 했었지만 생각의 탈을 쓴 감정은 일단은 통행을 중지시킬 필요가 있다. 비난의 탈을 벗고 그냥 이런 감정이 든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일단은 멈추게 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효과가 좋다.

감정의 문을 통과하고 남은 친구는 대부분 걱정이다. 아까 말한 대로 이성은 굳이 먼저 오지 않는다. 그러면 아주 대충, 빠르게. A4용지를 반으로 접어서 걱정을 한쪽에 쓴다.

‘내일 이 일이 제대로 안 굴러가고 망할 것 같아’
‘과장님은 이런 부분을 지적할 것 같아’
‘식단을 지켜야 하는데 내일 밥 먹으러 집에 다녀올 수가 없어’

그러는 다른 편에는 걱정을 이성의 형태로 추출하기 위해 써본다. 이성은 이렇게 적힌다.

'일이 어떤 부분에서 안 돌아갈 것 같은가’
‘지적은 왜 어떤 이유로 할 것 같은가’
‘그 지적을 내가 수용할 여유가 있는가’
‘회사에 있으면서 식단처럼 먹으려면 뭘 먹어야 하지'

이렇게 쓰고 나면 한 뭉텅이로 있었던 생각의 털고르기를 하는 느낌이다. 나는 감정과 이성, 걱정과 이성이라는 이 인위적이고 편리하기 위해서만 만든 구분에 크게 구원을 받는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걱정을 이성으로 착각했고 감정과 걱정에 휩쓸리는 것을 머리를 쓴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그것들 하나하나를 들어서 검수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에 대한 생각만큼은 조급하게, 마치 코난 비디오를 가지러 갈 때만큼 조급하게 판단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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