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재물운이 많다 = 번뇌가 많다

분별심에 대한 정리

by 호지차와 낙지좌

사주에는 '재'(財)라는 개념이 있다. 한자 뜻만 보면 재물 재 자로 대충 보통 '재물운'이라고 해석한다. 당연히 돈을 잘 번다는 뜻이니 다들 재가 있기를, 또 많기를 바라며, 없다고 하면 크게 실망한다. 한편 사주에서는 특정 성질이 많으면 그다지 좋게 해석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계속 여름처럼 뜨겁기만 하거나, 계속 냉골처럼 춥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을 극단적이라고 표현한다. 특정성질이 과다한 것은 극단적인 것이기에 좋지 않아서 나에게 없는 성질을 보완하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좋은' 재물운이 과다하게 많으면 어떻게 될까.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내가 바로 그 '재(財)가 과다'한 사주이기 때문이다. 먼저 나는 재(財)의 성질을 부자, 혹은 부자의 자질이라고 보진 않는다. (경험적으로 내가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은 아니다.)

피부로 느끼는 재(財)의 강한 특징 중 하나는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든 바라는 마음이 없겠냐만은 사주에 따라 누군가는 즐기는 마음가짐이 크기도 하고 행동하는 마음가짐이 크기도 하며, 받는 마음가짐이 크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받는 마음과 바라는 마음은 다른 것인가? 받고자 해야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받는 것과 바라는 것은 차라리 상극에 가깝다. 받는 행위는 수용하는 행위이다.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간단하다. 주는 것에 토를 달지 말아야 한다. 즉 이것저것 고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바라는 마음가짐은 갖고 싶은 것이 분명하고 계속 따져댄다.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내가 바라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게 과자여서는 이유식을 내 입에 넣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받는 사람은 주는 이의 마음을 그대로 수용하기에 기꺼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행동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로 바라는 마음과는 조금 다르다. 행동은 바로 하는 것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행동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무엇이 나에게 필요한지 따지는 사람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일단 일어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머리를 굴리게 되니 결국 바라는 마음은 행동하는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


재(財)의 성질만 과다해지면 바로 불교에서 그토록 경계하는 분별심이 된다. 이것은 포크다. 그러나 포크로 머리를 빗는 인어공주는 그것을 빗이라고 여긴다. 이런 식으로 분별하는 습관을 서서히 줄여가면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주요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재(財)를 다스리지 못하면 오로지 분별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가장 쉽고 분명한 분별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내 것과 너 것'이다. 그리하여 재(財)는 소유욕과 이어지는 것이고 돈과 이어지면 '재물운'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재(財)의 실체는 돈을 많이 버는 성격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저 분별하여 '내 것'을 갖고 싶은 상태일 뿐이다.


내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하여 돈을 원하게 되면 그것은 부자가 되는 수많은 길 중 하나가 될 뿐이다. 누군가는 몸이 먼저 움직여서 부자가 되기도 하고 잘 받아서 부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라는 마음이 반드시 재물을 얻게 해주는 것은 아니며 바라는 것을 얻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덧붙여, 이 글은 사주의 이론을 설명하는 글이라기보다는 그 개념에 착안하여 쓴 에세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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