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사망했다, 마침내
마침내라는 말을 덧붙였다는 이유로 나는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가 아니면 이 마음을 설명할 단어가 마땅히 없다. 아버지, 아니 그저 생물학적 친부일 뿐인 그는 2024년 7월 31일 오전에 사망했다. 요양병원에 홀로 사지가 마비된 채 천장만 바라보며. 병원 측에는 이미 무연고 사망 처리 의사를 밝혀놓았다. 친부의 시신은 공영장례 과정을 거쳐 화장 후 어딘가에 안치됐다.
지금부터 나는 친부를 왜 무연고자로 처리했는지, 보는 사람에 따라선 패륜이라 할 만한 선택을 왜 했는지 설명할 것이다. 이 설명을 시작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훗날 부계 쪽 가족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안희석은 지 애비 장례도 치러주지 않은 패륜아다”라거나 “패륜아가 만드는 책은 사주면 안 된다”라고 주장할 때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런 말이 있다. 한 집안에 작가가 태어나면 그 집안은 쑥대밭이 된다는 말. 그 말을 잘 실천해 보겠다.
가정폭력과 폭언이 습관이던 친부. 어릴 때 우리집엔 성한 가구가 없었다. 틈만 나면 화가 난다는 이유로 집안 모든 것을 부쉈고, 부술 게 없으면 가족을 부수던 그였다. 그러던 그와 엄마는 2017년에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친부의 외도였다.
이혼 1년 전 여름밤, 친부의 카카오톡 계정이 로그인된 거실 노트북에서 “까똑!” 알림음이 울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엄마는 노트북을 열었다.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친부와 어떤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행지 숙소 예약은 잘 됐는지, 밤에 야시장 가서 뭘 먹을 것인지, 지금 주차장 어디에 기다리고 있는지 등이 메시지로 오갔다. 친부는 그날 우리에게 타지 출장을 가야 한다고 했던 상태였다.
엄마는 침착히 더 기다렸고, 마침내 친부와 그 여자는 하루 100만 원짜리 풀빌라에 도착했다. 서로 수영하는 사진, 셀카, 음식 사진 등이 대화창에 업로드됐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여행할 때, 그날 찍은 사진을 공유하듯이 말이다. 여기까지 진행됐을 때 나도 집으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했고, 사설 탐정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친부 추적을 부탁한 후 300만 원을 입금했다. 사무소에서는 다음 날, 이혼 소송에 결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사진 몇 장을 보냈다.
그때부턴 지난한 싸움이었다. 소송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신용불량자 처지인 친부에게 법적으로 받아낼 게 없었다(그는 사업 수익을 모두 현금으로 받아 어딘가에 숨기며 생활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상담받아도 변호사 역시 합의 이혼을 잘 이끌 방법을 찾는 게 낫다고 했다. 그렇게 1년을 싸웠다. 1년의 실랑이가 끝날 때쯤 친부는 자기 발로 집을 나갔다. 더 이상 우리랑 못 살겠다며 엄마에게 이혼하자고 했다.
다만, 본인은 앞으로 사업하면서 혼자 살아야 하니까 주택담보대출로 8천만 원을 챙기겠다고 했다. 만약 해주지 않으면 지난 1년처럼 집에서 술만 마시고 계속 우리를 괴롭힐 거라고 했다. 선택권이 없었다. 친부는 8천만 원을 두둑이 챙긴 채 풀빌라에서 함께했던 그 여자와 새살림을 차렸다. 당시 나는 취업준비생이었고, 동생은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이었고, 엄마는 대형마트 판촉사원으로 이제 막 일하기 시작했던 상황이었다.
누가 누가 더 힘들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남은 셋은 그저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지난 1년의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이혼 후 3년쯤 지나자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친부가 갑자기 다정한 말들을 건네며 나와 동생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우리를 찾지 않던 사람이 꼭 한번 밥이라도 먹자고 했다. 여러 번 거절하다가 어쩔 수 없이 마주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그 여자와 헤어진 것으로 보였다. 자꾸만 자신이 ‘혼자’라는 걸 강조하며 아쉬운 소리를 했다. 엄마에게도 여러 번 전화하고 나와 동생에게 지속적으로 만남을 요구했다. 생활 속 거리두기가 해제되기까지 약 3년 동안 끈질겼다. 거부의 거부가 거듭되자 마침내 그는 협박을 시작했다. 너희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갈 거라고, 무조건 가서 기다릴 테니까 거기서 보자고 했다. 협박을 잠재울 방법은 애매한 말로 ‘언젠가 얼굴 보자’ 식의 뉘앙스를 전하는 것뿐이었다. 날이 좀 풀리면 뵈어요, 추석 끝나고 뵈어요, 올해 가기 전에 밥 한번 같이 드셔요 따위의 말을 키보드로 꾹꾹 누르며 그의 분노를 매번 달랬다.
아, 그가 집을 담보로 받아 간 8천만 원의 대출 원리금은 그가 갚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자기가 원리금을 내겠다고 하더니 그 여자와 헤어지고 나자 “내가 살지도 않는 집 대출금을 내가 갚기는 힘들다”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던 일이다. 엄마와 나, 그리고 첫 직장을 잡은 동생이 매달 나눠서 갚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취업 후에도 여전히 대출금 갚기와 생활비 소진에 허덕이느라, 딱 20만 원이 부족했던 20대 후반 시절. 그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해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다음 달 월급 받으면 곧바로 갚겠다고 했다. 돌아온 말은 꽤 서늘했다.
“니도 너거 엄마처럼 자꾸 돈 돈 거리지 마라. 지긋지긋하다. 참 섭섭하네. 오랜만에 먼저 연락한 이유가 돈 때문이가?”
그날로 결심했다. 나는 애초에 아버지 없이 자란 사람이라 생각하기로.
불편한 존재로 계속 남아있던 그로부터 2024년 4월 낮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받지 않았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술에 취한 채로 전화했기에 낮부터 그 불쾌한 목소리를 듣기 싫었다. 벨이 끊기자마자 다시 걸려 왔다. 또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왔다.
‘119구급대원입니다 연락바랍니다’
구급대원의 말로는, 친부가 술에 취한 채 운전석에 오르다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차체가 높은 차에 올라타다가 발을 헛디뎠고, 그대로 뒤로 넘어지며 후두부가 손상됐다고 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그렇게 길에서 쓰러진 그를 행인이 발견해 119에 신고했다. 구급대원은 가족 중 누군가가 빨리 병원에 와야 한다고 다그쳤다. 생명을 살려야 하는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태도겠지만, 망설이는 목소리의 나를 의아하게 대했다.
친부는 부산에, 나는 진주에 살아서 당장 갈 수 없었다. 이에 같은 부산에 살고 있던 동생이 병원으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몰랐다. 꼭 가족이 가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우리는 응급상황에 가족이 마땅히 응하지 않으면 부양의무 등을 이유로 처벌받는 줄 알았다. 병원에 도착한 동생은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의 경멸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다. 자기 아버지가 쓰러졌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모습에 대놓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라며 다그쳤다. 동생은 아직 사회 경험이 적었다. 이 모든 상황을 갑작스럽게 맞은 탓에 의료진의 지시대로 행동했다.
그렇게 5분만에 친부의 모든 수술과 입원에 따른 비용은 동생이 책임지는 구조가 됐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빠진다면 절대로 서명하지 않길 바란다. 그동안 연을 끊고 살았던 상태를 증명할 수 있다면, 힘껏 외면하고 도망치시길 바란다. 잠깐의 패륜아 취급은 훗날 이어질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멀리, 정말 멀리 도망치시면 좋겠다.
친부는 중추신경이 손상돼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했고,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수술 후 한 달간 대학병원에 누웠다. 수술비와 입원비는 총 1,200만 원이 나왔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찾아가서 상담받고, 각종 법안을 찾아봐도 소용없었다. 책임 서명을 한 이상 의료 소송을 시작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내 명의 통장에서 1,200만 원을 병원으로 송금했다. 친부는 그렇게 숨만 붙은 채로 요양병원에 이송됐다.
숨만 붙은 상태라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친부였다. 그가 살면서 돈을 얼마나 모았는지도 몰랐다. 은행계좌 하나 없이 살았고, 설령 제2금융권 계좌가 있다 하더라도 잔액이나 비밀번호를 알 방법이 없었다. 사실 기대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허영 속에 살았고, 이혼 후에는 더 엉망으로 살았기에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술에 취해 객사 직전까지 갔던 그곳도 그가 살던 원룸 주차장이었다. 주택담보대출로 가지고 갔던 8천만 원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양병원에는 보호자 책임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대학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이송할 때는 병원이 바뀌니까 새로운 책임 서명이 필요하다. 나와 동생은 이 서명을 거부했다. 대학병원은 ‘보호자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조건으로 인근 요양병원을 물색했고, 마침내 한 요양병원을 찾아냈다. 친부는 그쪽으로 이송됐다. 법률공단에서 "독립 가정으로 산 세월이 오래됐고 정서적, 물질적 교류가 거의 없었기에 부양의무를 이유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극히 적다"라고 알려준 덕분이었다.
요양병원에 누차 전달했다. 우리의 상황은 이렇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이에 우리는 보호자 역할을 하나도 하지 않겠다고. 요양병원은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고 했다. 대신, 친부가 수익이 없는 상태이니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신청해서 의료 지원을 국가로부터 받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요양병원은 정부로부터 보장을 받고, 우리는 돈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해주겠다고 했다. 과정에 필요한 전화를 수차례 받고, 필요한 서류에 몇 차례 서명했다.
사실 그가 요양병원에 이송되기 전에 대학병원에서 먼저 그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신청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래야 요양병원들이 금방 환자를 데리고 갈 것이기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친부의 주민등록주소지 관할 행정복지센터에 전화했었다. 하지만 행정복지센터 남자 직원은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하... 민원인께서 뭘 모르시고 이런 전화를 하는 거 같은데, 자녀분들 소득 같은 것도 다 심사해서 하는 걸 이렇게 전화로 턱 부탁하면 뭐 금방 되는 줄 아십니까? 그리고 아버지라면서요? 아버지가 병원에 누워있는 거 뻔~히 아는 자녀분들이 의료지원 신청하고 부양의무 거부 같은 걸 말하면 저희가 예~ 하고 뭘 해주겠습니까 상식적으로? 그게 무슨 연이 끊긴 상태입니까?”
전화를 끊고 창피하게도 울었다. 안 되면 안 된다고 설명해 줄 줄만 알았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할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복지센터’니까 말이다. 순진했다기보다는 멍청했다. 수많은 민원을 받아낼 공무원에게 구구절절 사연을 푸는 것 자체가 바보였다.
이후 요양병원에서 직접 이 과정을 진행하자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친절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그냥... 세상이 그렇다.
친부가 누워 있는 동안 가족해체신청을 비롯한 여러 서류 작업을 요양병원에서 진행했다. 친부의 주민등록주소지를 요양병원으로 바꾸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등록하는 등의 과정 동안 관할 지역 구청에서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 가족해체와 관련해선 이유를 말해야 했다.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듣게 되실 공무원분께 미리 죄송하다 말씀드린 후 사연을 짤막하게 풀었다. 1부터 10까지의 이야기를 내가 전했다면, 공무원분은 7정도 들었을 때 이미 “아 그럴 수밖에 없었겠네요” 등으로 맞장구를 치셨다. 지난번 사무적이면서도 가르치려던 그 남자 공무원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부가 요양병원에 드러누운 지 두어 달쯤 지났을까. 병원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OO 병원입니다. 안OO 님 사망하시어, 무연고 처리 위해 연락드립니다.’
엉망으로 살며 당뇨, 고혈압, 합병증 등 온갖 것을 신경쓰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런 몸으로 가만히 누워있으니 회복될 리 만무했다. 마침내. 사망했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필요한 사항을 듣고, 무연고 사망 처리를 부탁드렸다. 병원은 구청으로, 구청은 다시 나에게로 확인 전화를 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그러자 친부의 형제 중 한 명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구청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받았다.
“그 아버님 형제분께서 무연고가 아니라 아드님께서 장례를 치렀으면 한다던데... 어떻게 할까요?”
“글쎄요. 저는 무연고 사망 처리를 하고 싶습니다. 정 장례식을 하고 싶다면 그분들께 직접 하라고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아드님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저희가 알겠습니다. 동생분도 마찬가지겠죠?”
“물론입니다.”
우스웠다. 그토록 아끼는 형제라면 자기들이 장례를 치르면 될 일인데 왜 나에게 그걸 강요하려는 걸까. 친부의 형제들이 생전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부계 쪽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서로 칼을 들이밀던 그런 사이다. 친부가 요양병원에 누워있을 때도, 대학병원에서 1천만 원 넘는 병원비가 나왔을 때도 아무도 나서지 않다가 이제야, 정말 이제야 장례식을 열라 말라 입을 대는 게 어이없었다. 그동안 살면서 겪은 그들이라면, 장례식 부조금이 탐났을 것이다. 네 애비가 나한테 빌린 돈이 있느니, 꼭 줘야 할 돈이 있느니 등의 지겨운 이야기를 할 사람들. 그들을 위해 내가 왜 파티장을 열어줘야 할까. 무시했다.
무연고 장례는 빠르게 진행됐다. 부산 영락공원에 ‘공영 장례’라는 이름으로 매일 무연고자들의 합동 장례가 이어지고 있다. 친부는 8월 1일, 두 명의 무연고자와 함께 6시간의 장례식을 보냈다. 당연히 나는 가지 않았다.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 부르기도 싫은 그의 시신을 내가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날이 올 텐데, 그 끔찍한 상황을 꼭 겪어야 할까? 하며 고통스러웠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친부를 제외한 나머지 두 분의 무연고 사망자분들의 명복을 빌었다.
합동 장례가 끝난 이틀 뒤, 8월 3일. 친부의 육신은 불에 태워져 사라졌다. 유골함에 담긴 채 어느 납골당에 안치됐다. ‘어느’라고 표현한 이유는 진짜로 몰라서 그렇다. 알아보려면 알 수 있겠지만, 그러기 싫어서 찾아보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내 삶에 남은 그의 흔적을 앞으로 부지런히 지워야 한다.
아참, 병원 측에서 유품을 어떻게 할지 물어봤다. 같이 태울 수 있으면 태워달라고 했다. 그의 스마트폰 안에는 그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와 메시지를 나눴는지 등이 존재했을 것이다. 알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겁이 났다. 누군가의 일기와 흔적을 읽다 보면 그를 미워하기 어렵게 된다는 말이 있다(문보영, 일기시대). 혹시나, 혹시나 내가 그의 사정을 ‘이해’하게 될까 봐 겁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애초에 아버지가 없는 채로 살았던 것처럼 앞으로의 인생을 보내고 싶었다. 모두 소각됐다.
지독하고 구린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제 나는 상속 포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 과정도 꽤 지난한 것으로 알지만, 그래도 잘 해낼 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가족으로 인해 고통받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계신 누군가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참고가 됐다면 그걸로 충분히 감사하다. 절대로 병원에서 보호자가 되지 말 것, 가능하면 힘껏 외면하고 도망칠 것, 당신을 비난할 사람은 세상에 없고 혹여 있더라도 비난하는 이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 무연고 사망으로 처리하면 당신이 끔찍한 시신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가정폭력과 폭언의 증거가 있거나 독립 가정으로 산 세월이 길면 부양의무라는 이유로 법적 처벌은 받지 않는다는 것 등을 강조하고 싶다.
혹여 그밖에 궁금한 정보가 있다면 여기 댓글에 남겨주셔도 좋다. 실시간으로 답을 드리긴 어렵지만 드문드문 들어와서 내 경우에 한해 알려드릴 수 있다.
시급하고 중요한 사항은 이 글보다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을 찾길 바란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 후 상담 예약하면 끝이다. 은행 창구 같은 곳에 가서 편안하게 법적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더라도 전문가와 상담했다는 이유로 마음이 꽤 편안해진다. 나도 이곳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시 한번 당부드리지만, 누구도 당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꼭 상담받아 보길 바란다.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길게 풀어 책으로 만들 생각도 하고 있다. 누군가의 ‘마침내 사망’을 기다리는 모든 분들께 닿길 바라며.
정말 끝.
-
독립출판사 발코니 대표
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