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평소와 똑같은 퇴근길이었다. 갑자기 길을 걸어가는데 숨이 안 쉬어지며 식은땀이 났다.
뭔가 잘못된 걸 느낀 순간 자리에 주저앉아 무서움을 떨쳐내려 괜찮다는 말만 되새겼다.
처음엔 스트레스가 많아 일시적으로
발생한 일이라 생각했고,
몇 년간 자주 응급실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오랜만에 아프네라고 넘기며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런데 고통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간혹이었던 증상은 종종으로, 종종이었던 증상은 자주로 바뀌어갔고 고통은 더 심해졌다.
미련하게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와 젊다는 방패 뒤로 무서움을 회피하고 복용하던 우울증과 공황장애 약을 높이면 괜찮을 거라고 도망쳤다.
그러나 고통은 그 틈을 타고 더욱 거세져
잠을 자다가도 호흡곤란이 오고 업무 중에도 가슴을 움켜쥐고 눈물 삼키는 경우가 잦아졌다.
나와 가장 먼 자리에 있는 다른 팀 직원분과 같이 남게 되었는데 며칠 전 울지 않았냐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 팀은 사무업무를 하며 자리가 독서실처럼 붙어있어 조용한 편이다. 다른 팀 직원분의 말에 내 흐느낌은 들리지 않은 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 내게 관심이 없었을 뿐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면서 예전 일이 떠올랐다.
몇 년 전 길에서 쓰러져 난생처음으로
구급차에 실려갔다.
길에서 쓰러지는 건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난 그런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기에
내게 일어날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현실에서의 이런 상황은 드라마같이
극적이지 않았다.
당연히 구해주는 히로인도 없었고,
많은 사람들의 집중이 있지도 않았다.
그 수많은 출근길 인파 속 쓰러진
나를 신고해주는 이는 한참 동안 없었다.
눈앞이 컴컴해지고 소리가 아득해 얼마나 쓰러졌는지는 모르지만 한참만이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지하철의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울림과, 바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몇 번 반복되고
조용해진 정적 속에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하는 무서움에 속으로 백번쯤은
'살려주세요'라고 외쳤던 것 같다.
그 순간 아주머니들의 웅성거림과
'아가씨 괜찮아? 구급차 좀 불러줘요'
라는 소리에 '살았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뒤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 뒤, 웅성거림과 함께
눈앞에 빛이 보였고 손에 무언가 닿고 나니
괜찮은지 확인하는 목소리와 함께 구급차에 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인지 되었다.
실려간 병원에서 눈을 뜨니 출근시간보다 한참 뒤였고, 혼자 사는 나는 보호자가 안 오시냐는 말에
'제 보호자는 저라서요'라고 답한 뒤 부재중 통화가 쌓여있는 회사에 스스로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다.
링거를 다 맞는 시간이 한 시간 반은 걸린다는
이야기에 가봐야 한다고 대답을 하니 쓰러지신 분이 이대로 가시면 위험하다는 말이 뒤따랐다.
오늘까지 마감인 사업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회사에 도착했다.
회사에서는 쓰러졌다는 사람이 상황설명을 위한
통화도 스스로, 출근까지 하니
별로 아프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는지.
팀장은 내게, '나도 쓰러져봤어, 여자들은 그런 경험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다.
내겐 그런 말은 별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맡은 일을 마무리 못 지었을 때의 나의 무능으로
치부될 입방아가 더 괴로웠기에 묵묵히
식은땀을 닦아내며 일을 했다.
그렇게 버텨왔었다. 어리지만 책임을 다해, 무시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이때가 사회생활 5년 차였다.
그 뒤부터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응급실을 한 달에 두세 번 가게 되는 생활이 2년간 반복됐다,
처음에 보호자가 없냐는 말에 창피하고 서러웠지만 아픈 날이 안 아픈 날 보다 많아지니
어른인데 왜 보호자가 없다는 것에 놀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몇 년간 단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심장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하면서도 별 이상 없다는 이야기를 하겠지, 단순히 스트레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도 처음 해보는 검사들과 계속해서 심해지는 통증에 걱정이 커졌다.
검사 결과를 듣는 날, 당연히 '이상 없네요'라는 말을 생각하고 간 내게 의사 선생님은 알 수 없는 용어들과 함께 3차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하셨다.
이해하지 못한 나는
"제가 어디가 크게 아픈 건가요?"
하는 물음으로 부정했지만,
큰 병원에 가서 다시 진료를 보는 게 필요하다는
답변과 근심을 한 아름 얻고 집으로 돌아왔다.
멍하게 돌아오며,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눈앞이 흐려졌다.
열아홉부터 십 년의 사회생활, 고작 29살이었다.
'나 되게 열심히 살았는데, 억울하다'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대학병원에 연락하니 두 달 뒤나 진료를 볼 수 있었고 그동안 느껴지는 고통은
더욱 심해져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그 순간 무언가 와장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니 거울 조각이 깨져 있고 거울 안에는 서럽게 울고 있는 교복을 입은 아이가 있었다.
거울 아래에는 조각난 유리조각들이 놓여있고 조각들에는 웃고 있는 커리어우먼 복장을 한
내가 있었다. 거울 안의 아이를 바라보다
그 아이의 교복이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울면서도 소리가 새어나갈까 웅크린 채 입을 막고 흐느끼고 있었다.
나였다. 열아홉의 나.
10년 전, 갑자기 사회에 나와 모든 걸 혼자 감당하던 어린 내가 거기 있었다.
당장이라도 거울 속으로 들어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주저하게 됐다.
지금 안아주게 되면 그동안 외면해온 여리고 약한 나를 들키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여태까지의 나는 여리고 약한 나를 안아줄 만큼 강하지 않아 외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오늘에야 내 모습이 백설공주 이야기 속 왕비와 같다는 걸 알았다.
나도 왕비처럼 거울에게 매일 물어보며 버텨왔다.
" 거울아, 나는 어떤 사람이지?"
" 당신은 사회에 잘 적응한 커리어우먼이네요"
10년간 나의 거울은 그렇게 말해주었다.
사회라는 거울 속 비치는 내 모습을 지켜야 했다.
그게 내게 진실이어야만 했다.
그러던 내게 10년이 지나 거울은 진실을 보여줬다.
마치 왕비에게 왕비님보다 백설공주가 더 예뻐요
라는 진실을 알려준 것처럼.
"당신은 사회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고 싶은 어린 아이네요"라고
10년간 외면해온 불편감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거울 안에 들어갔다. 열아홉의 나는 여전히 소리가 새어나갈까 입을 막고
누군가 온지도 모른 채 웅크리고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안아줬다.
언제 손길이 닿았는지 모를 만큼 차가운 교복의 온도가 그간의 외로움을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아이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난 말없이 더 힘을 주어 안아주었다.
혼자 두어서 미안했단 사과를 대신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