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함은 쓴맛 뒤에 가장 강하다
12년이란 긴 시간의 답이었다.
어렸을 적, 공부하는 게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공부를 잘하면 받는 관심이 좋았다.
내가 공부를 잘할수록 엄마는 행복해했고, 아이의 성적이 엄마들에게 트로 피란 게 어린 내게도 느껴졌다. 학교에 올 때면, 선생님들은 엄마를 반겼고 나를 칭찬하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엄마는 행복해하셨고, 내게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엄마의 웃음, 그게 좋았다. 엄마의 행복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달콤한 과자집이 기다릴 것 같았다.
그렇게 난 과자집의 문을 열었고, 칭찬이라는 달콤함으로 가득할 줄 알았던 과자집은 압박이라는 쓴맛이 뒤덮고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많은 게 흔들렸다. 학업의 양은 증폭되고, 학교와 학원이 끝나면 새벽이었다. 시험기간 며칠간 자지 못하고 잠들더라도 시험을 망치는 악몽을 빈번하게 꾸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로 음식을 먹지 않아 점점 말라갔다.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에 혼이 날게 무서워 시험성적이 나오는 날이면 놀이터에서 불안함을 친구 삼아 하루가 끝나길 기다렸다. 달콤함이 가득할 줄 알았던 과자집에 가득한 건 쓸쓸함이었다.
그 시간들 속에 나는 친구 사귀는 법을, 사람과 감정 공유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사람을 사귀는 법에 서툴렀고 성적에 집착하는 내 모습은 또래에겐
재수 없는 아이였다.
그렇게 성적에 유난인 아이로 인식되어 자연스레 따돌림을 당하는 시간들을 겪게 되었다. 다행이었던 건 공부를 어느 정도 하기에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는 나를 심하게 괴롭히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성적에 집착하게 되었다.
난 따돌림을 당하면서 내가 모자라서라고 생각했다. 그 모자람으로 엄마가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혼이 나지 않을까 하며 매일 밤 내일이 오지 않길
바라며 잠이 들었다.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던 괴롭힘은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수학여행에서 극을 다했다. 같은 방이 되어 괴롭힐 계획을 짜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옷을 찢는다는 말과 함께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옷장에 숨어있고 다른 방으로 도망 다니며 없는 사람처럼 버텼다.
그날의 기억으로 무서움은 극에 달했고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말들을 했지만 엄마는 내 신호를 몰랐던 것 같다.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더 큰 괴롭힘으로 돌아온다는 걸 주변 친구들을 보며 알았다. 그땐 전학을 가는 게 내 인생의 실패라고 생각했기에 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휘어지는 법을 몰라 부러지는 길을 가고 있었다. 괴롭힘은 나날이 심해졌고, 내 짐을 복도에 뿌려놓고 마지막엔 생리대까지 떨어뜨리는 등 괴롭힘의 다양함을 하루마다 깨달았다. 우리 집은 11층이었는데 창문에 앉으면 바로 낭떠리지였다. 난 내 방 창문에 자주 앉게 되었다.
그렇게 괴롭힘의 수위가 높아져가는데 계속되는 무반응인 나의 모습에 흥미를 잃었는지 따돌림은 유행처럼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나는 더욱 폐쇄적으로 공부에만 집착하며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에 대한 기대는 일절 없었다.
내게 학교는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지 우정의 추억이 담긴 곳이 아니었으니
엄마는 외고나 자사고로 나를 진학시키려 했으나, 생각보다 큰 등록금과 어설프게 높은 성적에 보기에 없던 특성화고 진학을 제안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특성화고라는 게 활성화되어있지 않고, 바로 취업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당황스러웠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었다. 엄마의 세상도 같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특성화고의 대입전형이 유리할 거라고 말했다. 엄마의 말을 따라가면 내 인생의 끝엔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본 처음이었다. 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허수아비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다른 학교를 고집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 우연히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보는 영화라고 생각했던 난 처음으로 설렘을 느꼈다. 지금도 영화가 눈앞에 생생하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보고 나온 어른들의 얼굴이 생생하다. 마치 아이가 된 것처럼, 순순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엔 어느새 어른은 사라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있었다. 마법 같은 모습을 보며 엄마에게도 이런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 했다. 엄마도 나도 현실을 내려놓고 행복해지길 바랬다.
난 과자집에서 탈출했다. 이곳은 여태 잘못된 곳이었다고, 진짜 과자집을 찾겠다며.
그렇게 영화, 영상을 공부하는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꿈이란 게 생겼다.
공부만이 전부인 세상에 살다 온 나에게 특성화고는 다른 세상이었다. 자신의 개성이 뚜렷한 친구들이 많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친구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친구들이 멋있었다.
나도 그 사이에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12년의 시간은 합격통지서로 내게 돌아왔다. 새로운 과자집을 찾아가는 지도가 내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날 지도를 잃어버렸다.
합격 사실과 등록금을 말한 날 엄마는 내게 집의 상황을 알려줬다. 점점 엄마와 아빠 사이의 대화가 없어짐과 어렴풋이 느끼던 집의 어려움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엄마의 약한 모습이었다. 엄마는 강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그런 엄마가 많이 약하고 무너진 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 곁을 떠날까 무서웠다. 수험기간 동안 며칠씩 사라졌던 이유가 몸이 아파 병원을 다니고 검사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 엄마도 나처럼 혼자였다. 엄마를 향한 원망은 미안함으로 곧이어 죄책감으로 번졌다
엄마는 내게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며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공부만 해왔던 아이에게 취업을 하라고 말을 하는 게 어려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지만 취업을 하면 좋을 텐데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바라던 과자집은 현실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과자집을 찾는 게 아니라, 내가 우리 가족의
과자집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가족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의 가치를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딸로 찾고 있었다.
급하게 취업준비를 했고 취업철이 아니던 때에
공고가 난 회사에 연습 겸 지원을 해보란 학교의 말을 따랐다. 덜컥 합격한 나를 학교에선 다음 학년들 취업준비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입사하길 추천했다. 사회에 나오기엔 아직 부족했지만 그렇게 나의 첫 사회생활이 갑자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