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길 Nov 10. 2020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추다 잠들다.(영화 '유스')

영화 '유스' / ‘스트라빈스키’  발레 '불새' 중 <자장가> 

 태어나 자라 누구나 자신의 자리를 누리다 그 힘이 다해 마침내 소멸되는 것. 생명체를 넘어 모든 물질의 운명이다. 시공을 초월한 듯한 우주마저도 그 시작이 있었다 하니 그 끝도 있을 것이지만 이쯤에서 가진 상상력의 빈약함을 절감한다. 또한 죽음 너머를 고민하기엔 당장의 삶의 본질에조차 접근하기 버거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이 삶과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 해답을 찾아 헤맨다. 하니 어찌 알겠는가? 수만 가지 해답 가운데 진실과 마주할 그 순간이 올지도. 


영화 '유스'


 아름다운 풍광으로 둘러싸인 스위스의 한 요양원, 그곳은 휴식을 위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사연과 경력을 지닌 이들의 공간이다. 최고급 요리와 서비스, 그리고 다채로운 공연이 밤마다 펼쳐지는 꿈 같은 공간이지만 싱그러운 시절을 지나 스산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이들의 마지막 장소이기에 을씨년스럽고 고요하기만 하다. 그런 그곳을 찾은 세계적인 음악가 ‘밸린저’(마이클 케인), 그는 이제 삶을 조용히 정리하는 것만이 남은 듯 평온한 듯 쓸쓸하다. 자신의 전부였던 음악을 향한 남아 있는 열정인 듯 자연의 소리에 맞춰 손을 흔들어 보지만 이 역시도 곧 스러질 듯 안타까울 뿐이다. 자서전을 내자는 세간의 제의에 자신을 잊으라 하는 밸린저. 이런 그와 함께 친구 ‘믹’(하비 케이틀) 역시 그곳에 머물고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성공한 삶을 살아 온 그는 아직도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여 여기에서도 작품의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있다. 그렇게 그곳엔 그 둘 외에도 세계적인 운동선수였던 이가 이제는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 가쁜 호흡을 버티고 있으며 서로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회색 빛만이 감도는 노년의 부부도 있다. 

 

 어느 듯 젊음을 지내버려 생명력을 모두 잃은 듯 머무는 곳. 하지만 그곳엔 보란 듯 젊음을 뽐내는 이들이 공존한다. 밸린저의 전담 안마사는 언제나 탄력 넘치는 몸을 빛내며 감각의 위대함을 피력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곳을 찾은 미스 유니버스의 싱그러운 나체는 평생 예술과 함께 살아온 밸린저와 믹의 입에서마저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탄성을 빚어내며 전날 보여준 그녀의 속물 근성마저 잊게 만들고, 자신의 몸을 팔기 위해 늘 로비에 앉은 여자는 그 젊음과 아름다움만으로도 그곳에 머무는 성공이라는 열매를 취한 이들의 지성과 부마저 비웃듯 이겨버리는 것이다.


평생을 예술과 함께 한 그들이지만 젊음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찾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밸린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을 찾아 나서는데 그 곡은 바로 그가 작곡한 것이다. 연습하던 아이의 “정말 아름다운 곡”이라는 말에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만든 곡”이라고 대답하는 밸린저,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영국 여왕의 연주회 요청은 완강히 거절한다. 이는 세상으로 다시 나올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이라 여기던 작품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된 ‘믹’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긴 채 건물 밖으로 몸을 던지자 이를 지켜본 밸린저는 이제야 깨달은 듯 다시 한번 연주를 위해 포디움에 선다.


발레 '불새'의 장면


 주인공 밸린저가 딸과 함께 산책을 하다 남편의 이별 통보를 받아 든 딸이 애꿎은 그에게 이유를 따져 묻는다. 그렇게 이 장면이 지난 후 마치 사진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발레인 듯 보이는 장면에서 죽음처럼 고요히 흐르던 음악이 있으니 바로 러시아 출신 미국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발레곡 <불새>(Firebird) 중 ‘자장가’(Berceuse)다. 


영화 속 자장가가 흐르던 장면, 아무런 움직임이 없지만 발레처럼 느껴진다.

 

 1882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 구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5인조의 음악적 리더이자 관현악법의 대가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y Korsakov )로부터 작곡을 배운 재원이다. 그가 본격적인 작곡 수업을 받은 것이 1902 년이었으니 그리 빠른 시작이 아니었음에도 인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09년,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 Ballet Russe)의 창설자 ‘디아길레프’(Serge Diaghilew)가 파리에서의 공연을 위한 곡을 의뢰해 온 것이다. 이는 젊은 무명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기회였기에 그동안의 작업을 뒤로 한 채 빡빡한 일정을 맞추기 위하여 오직 <불새>에 전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은 그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신예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해주는 초석이 되었으니 실로 영혼과 열정이 넘치도록 담긴 곡인 것이다. 이러한 불새의 시나리오는 전설적인 안무가 ‘마하일 포킨’(Michel Fokine, 1880~1942)의 것으로 동 슬라브 지역의 민담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내용은 이러하다.


 불멸의 마왕 카셰이의 정원, 이곳에 있는 마법의 나무에 열린 황금사과를 따 먹으려던 불새는 왕자 이반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위급할 때 도와주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황금깃털을 얻은 이반은 불새를 놓아 준다. 이제 이반은 어느 오래된 성 앞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열두 명의 처녀와 공주 차레브나를 만나 여기가 마왕 카셰이의 성이라는 말을 듣는다. 마법에 빠진 공주를 사랑하게 된 이반, 하지만 안타까운 새벽이 다가 와 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공주, 이반은 공주의 경고를 무시한 채 그녀를 구하기 위해 성으로 들어간다. 이때 갑자기 몰아치는 끔찍한 무리들, 그리고 곧 마왕 카셰이가 등장하여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 가운데 마왕은 이반을 돌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이반이 도움을 요청하자 불새가 나타나 모두에게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추도록 마법을 건다. 그렇게 모두가 잠들고, 왕자는 불새와 함께 마왕의 영혼이 든 구슬을 찾아 내어 깨트리자 카셰이는 죽고 무리들은 마법에서 풀려 나 공주와 이반은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하나가 된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이러한 이야기를 발레로 담아낸 <불새>는 ‘카셰이 왕의 지옥의 춤’에서 들려주는 광폭함과 ‘자장가’에서 들려오는 몽환적인 선율, 무엇보다도 곡을 관통하며 흐르는 이국적인 뉘앙스와 색채감으로 1910 년 6월 25일,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되자마자 관객들을 매료시키며 스트라빈스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큰 인기를 모으게 된다. 작곡가는 이에 부응, 50여분에 달하는 곡을 줄여 연주회용 모음곡의 형식을 빌어 콘서트장으로 가져오는데, 피날레가 생략된 1911년 버전, 자장가와 피날레가 첨가되어 그 전개가 자연스러워 가장 자주 연주되는 1919년 버전, 그리고 원곡을 좀 더 담으려 노력한 1945년 버전이 있어 작품이 지닌 순 음악적 감동을 전한다. 

쓰러질 때까지 춤추다 잠들다…… 젊음과 맞바꾸어 세상에서 춤추다 이제는 잠자듯 스러져 가는 영화 속 인물들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곡을 사용한 것일까? 곡이 흐르는 동안 영화 속 모든 것이 멈춰 선 듯만 하다. 그게 아니라면 주인공 밸린저와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친분이 있다는 영화적 설정 때문인지 혹은 몽환적인 영화의 장면을 위해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장면과 선율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점은 분명하다. <불새>가 사용되어 감동적이었던 또 하나의 영화로 <환타지아 2000>을 빼 놓을 수 없다. 과연 그 상상력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케 만드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유명 클래식 작품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8개의 단편적 에피소드를 엮었으며 그 마지막이 바로 <불새>다. 영화의 마지막, 불새에 의해 태워져 잿빛으로 변해 버린 세상을 숲의 정령이 초록으로 물들여 나가던 장면에서의 피날레는 시각적 감동과의 완벽한 시너지로 이루어 낸 예술적 장관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심플 송'을 부르는 조수미

 영화 <유스>엔 놓치지 않아야 할 또 하나의 곡이 있다. 주인공 밸린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만들었다 고백했던 곡, 소년이 연습하던 바이올린으로 일부만을 들려주어 궁금증을 자아냈으며 다시 포디엄에 선 밸린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던 그 선율, 바로 <심플 송>(Simple Song)이다. 제73회 골든글로버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곡, 그리고 이때의 장면에서 등장하는 가수는 ‘조수미’다. 여왕이 부탁한 콘서트마저 한사코 거절하는 밸린저에게 그를 찾아 온 책임자가 묻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그리고 결코 이유일 리 없다는 듯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예요.”




추천음반

 작곡가가 스스로 지휘봉을 잡은 1967년 음반(SONY)이 연주의 호불호를 떠나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근 현대 음악에 있어 강점을 드러내는 지휘자 ‘피에르 볼레즈’(Pierre Boulez)가 시카고 심포니(Chicago Symphony Orchestra)와 함께 호흡을 맞춘 1910년 발레버전 또한 빼어난 연주(1992)로 회자되는 가운데 1919년 모음곡 버전으로 지휘자 정명훈이 자신이 재임했던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대동하여 이루어낸 연주를 추천하는 바이다. 작품이 지닌 순 음악적 가치를 가감 없이 드러낸 연주로 특히 피날레에 있어 울려나는 예술적 고양감이 압권이며 다소 먹먹하다 여겨질 수 있는 음질은 오히려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다가 온다. 함께 커플링된 ‘코르사코프’(Rimsky Korssakoff, 1844 ~1908)의 <세헤라자데>(Scheherazade Op.35) 역시 좋은 연주이니 소장 가치가 높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알프레도여, 안녕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