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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Feb 06. 2021

영화 '허드서커 대리인'

꿈결 같은 선율이 데려다 놓은 그곳 / 하차투리안  '스파르타쿠스'

시골에서 막 상경한 노빌(팀 로빈스), 그가 대도시 뉴욕에서 직업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우연히 허드서커사의 구인광고를 본 노빌은 그곳을 향하고, 허드서커 빌딩의 44층에서는 이사회가 한창이다. 이때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보고를 받던 회장 허드서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창문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고 이를 지켜 보던 머스버그 이사(폴 뉴먼)는 그 자리에 있던 이사들과 함께 자격이 현저히 떨어지는 대리인을 사장으로 내세워 주가를 떨어뜨린 후 다시 그 주식을 거둬들여 경영권을 차지할 계략을 세운다. 이러한 계략에 적임자로 낙점된 노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회사의 사장이 되고 한편 이를 수상히 여긴 기자 에이미는 신분을 속인 채 그의 비서가 되어 마침내 은밀한 이사회의 계략마저 파악하는 동시에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주가가 폭락하고 이때 노빌은 주머니에 늘 지니고 다니던 설계도를 꺼내 놓으며 회사를 살릴 획기적인 아이디어 상품이라 소개하지만 낡은 종이에는 그저 완벽한 원 하나가 그려져 있을 뿐, 실패를 확신한 머스버그는 생산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사회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디어 상품은 대성공을 거두는데 그것은 바로 ‘훌라후프’. 성공의 달콤함에 빠져 버린 주인공 노빌, 이제 그의 하루는 게으르게 흘러가고 이전의 노빌로 돌아오라는 에이미의 간곡한 충고마저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친구처럼 지내던 동료의 아이디어를 조롱하며 심지어 그를 파면하기까지 한다. 한편 계획이 틀어진 머스버그는 회사를 차지할 새로운 계략을 꾸미고 여기에 말려든 노빌은 다시 한번 파멸을 향해 치닫는데…….


- 기발한 상상력으로 현실이 동화처럼 다가오는 영화 '허드서커 대리인'

1959년을 맞이하는 뉴욕의 밤을 배경으로 누군가의 독백이 들려오며 영화는 시작된다. 이때 하늘을 가르는 카메라워크와 함께 신비롭게 흘러 나오는 선율이 있으니 바로 구 소련시절의 작곡가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의 발레 <스파르타쿠스>(Spartacus) 중 ‘스파르타쿠 스와 그의 아내 프리기아를 위한 아다지오’(Adagio of Spartacus and Phrygia)이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작곡가 하차투리안은 늦은 나이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자신의 고향인 아르메니아의 민속 선율을 서구화된 작곡 기법에 녹여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그는 ‘프로코피에프’(Prokofiev),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와 더불어 20세기 구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평가 받으며 대표작으로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inor)과 발레음악 <스파르타쿠스>, 그리고 <가이느>(Gayane)를 남겨 놓는다. 이중 영화에 사용된 발레곡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그의 죽음을 다룬 대작으로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검투사로 노예들의 반란을 주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외치며 로마의 폭정에 저항했던 인물로 비록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많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준 역사적 인물이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하차투리안 (1903~1978)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 온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아내 프리기아는 노예시장에서 다른 곳으로 팔려가며 이별을 맞고 죽음의 결투를 벌여야 하는 검투사가 된 스파르타쿠스는 동료를 규합, 탈출을 도모한다. / 탈출에 성공한 노예들, 이제 크라수스 장군과 스파르타쿠스의 결투가 벌어지고 여기서 승리한 스파르타쿠스는 장군을 추방하기로 한다. / 치욕적으로 살아 남은 장군은 복수를 위해 로마군단을 이끌고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하여 나타나고 스파르타쿠스는 이에 맞서 싸우다 결국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아내 프리기아가 슬피 울부짖는 가운데 그를 찬양하는 민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진다. 


- 발레 '하차투리안'의 장면들

이러한 내용 중 영화에 사용된 '아다지오'는 3막에 등장하며 프리기아와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의 2인무다. 그 선율이 아름다워 한번 들으면 쉬이 잊혀지지 않는 매력을 지닌 것으로 듣다 보면 상당히 이국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국 아르메니아의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한 작곡가의 작풍이 드러난 것이다. 하여 그 화성이 매우 독특하면서도 이국적이며 이를 타고 흐르는 선율 또한 변방의 것, 고대의 것으로 꿈결 같아 지극히 현실을 배경으로 하였으나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어 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뉴욕을 보여주는 듯 몽환적인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 프리기아와의 2인무


동그란 원 하나만 달랑 그려진 설계도로 성공을 확신하는 노빌, 하지만 도무지 팔리지 않는다. 그렇게 길에 내다 버려진 훌라후프는 정처 없이 굴러가다 어느 소년의 앞에 멈춰 서고 이때 멋지게 실력을 뽐내는 소년, 이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상점으로 내달려 이제 훌라후프는 미 전역을 휩쓰는 히트 상품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관통하며 흐르는 음악이 있으니 ‘하차투리안’의 또 하나의 명작 <가이느> 중 '칼의 춤'(Sabre Dance)이다. 이 곡은 하차투리안의 작품 중 대중에게 알려진 가장 친숙한 멜로디이자 그의 이름을 단숨에 세계에 알린 출세작으로, 코카사스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해지는 민속음악적 색채를 지녔기에 이 역시 작곡가의 작풍이 물씬 풍기는 것이다. 곡은 첫 4마디의 호전적인 도입부 이후 유명한 주제부가 격렬하게 이어지다 여러 악기로 재현되며 고양되어 마침내 폭발하는데, 마치 중앙아시아의 무사들이 말을 타고 도전해 오는 듯 상당히 원시적이면서 강렬하다. 하여 절묘하고도 빠르게 전개되는 영화적 장면에 커다란 긴장감을 불어 넣어 주는 효과를 발휘하며 노빌의 아이디어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숨죽여 지켜보도록 하는, 참으로 절묘한 음악의 활용인 것이다. 


- 하차투리안의 명곡 '칼의 춤'이 흐르던 장면




영화에서는 세 번의 다른 아이디어 상품 설계도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도안은 모두 같으며 완벽하게 둥근 원이다. 첫 번째는 훌라후프였으며 동료가 보여 준 두 번째의 것은 구부러지는 빨대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또 한번 이사회에서 발표한 그것은 바로 원반이다. 이것뿐이겠는가? 접시, 각종 구기 종목의 공, 오늘날 없어서는 안될 자동차의 바퀴 등. 그렇다면 원의 모양을 지닌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무엇일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것은 오늘도 바쁘게 돌아가며 변함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추천음반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는 ‘므라빈스키’(Mravinsky)의 뒤를 이어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구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장이 된 ‘테미르카노프’(Yuri Temirkanov)의 음반(SIGNUM, 2005)이 추천의 대상이다. 이전의 러시아적 박력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대목이 있을 수 있겠으나 오랫동안 서구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쌓아 온 지휘자의 음악적 유연함이 곡의 아다지오와 만나 그 신비로움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작곡가에 의한 자작 자연이 항상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스파르타쿠스>에서의 성과는 탁월하며 아직까지도 경쟁자가 없어 보인다.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 하차투리안의 확신에 찬 해석은 이 곡이 자신의 작품이라 웅변하는 듯 하며 이를 멋지게 울려내는 빈 필의 역량은 최고이며 녹음 또한 훌륭한 명연주 명음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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