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사회는 우리의 행복을 억제한다.
한때는 하루가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 같아서 매 순간을 죽을 각오로 버텨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긴긴 전쟁 끝에 평화가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나의 하루는 아주 평범하게 흘러갔다. 특별히 내 일상에 균열을 내는 나쁜 일도, 누군가의 레이더망에 콕 잡혀 집중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일상이 점점 더 공허해진다. 뭘 해도 기쁨은 찰나에 불과하고, 금세 밀려오는 무력감에 온몸이 꼼짝없이 백기를 든다. 어제보다 조금 더 잘 살아보려고, 행복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만끽하고 싶어서 끝도 없이 노력하는데, 왜 열심히 살수록 점점 행복에서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이런 마음을 내뱉으면 사람들은 말한다. 행복을 바라보는 내 눈이 너무 높은 거라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몰라서 그렇다고. 지금보다 더 바빠지면 그런 생각 안 들 거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밀물처럼 순식간에 밀려오는 이 감정은 내가 게으르거나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걸. 이 공허함은 어쩌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 에서 말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하지만, 문명은 그 쾌락을 억제하도록 설계돼 있다.”
행복이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건 내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순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쾌락과 문명 사이, 그 틈바구니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내 행복을 어떻게 구원해야 할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이 원하는 행복이란 쾌락법칙에 따라 고통이 없거나 혹은 강한 쾌감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행복이다. 본디 행복은 고통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개별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임의로 둘 중 하나의 상태만을 취하고 다른 하나는 제거하여 독립시킬 수는 없다.
문제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하지만, 문명은 이 본능을 억제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욕망을 누르고 질서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회화란 사실 내 욕망을 포기하는 훈련에 가깝다. 즉, 문명은 우리에게 안전과 편의를 제공하는 대가로 우리에게 욕망과 감정을 관리할 것을 당당히 요구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기꺼이 그 요구를 따르며 성장했지만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이었더라?’는 질문조차 낯설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서 가장 외롭게 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내 인생의 역사를 되감아보면, 나 역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건실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집에선 부모님의 말 잘 듣는 착한 딸.
학교에선 타의 모범이 되는 착실한 아이.
회사에선 어떤 일이든 척척해내는 믿음직한 직원.
이상은 높은데 하필 타고난 사회성이 평균은커녕 0에 가까웠던 나는 남들보다 두 배, 세 배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덕분에 눈치를 최고 미덕처럼 떠받드는 한국 사회에서 내 삶은 늘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사회와 타인의 기대에 나를 맞추느라 정작 나를, 내 행복을 돌보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 참아야 했고, 바로 그 "때"라는 게 되었을 때에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이유로 또 한 번 삼켜야 했으며, 마침내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펼치려 했던 내 꿈들은 남들의 평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 마음 한편에 잘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잘하는 일' 하는 게 현명하다는 말이, 실은 내 행복은 적당히 포기하고 고통을 즐기는 법을 빨리 배우라는 말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방황과 방랑을 거듭하며, 나는 스스로를 다듬고 깎으면서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스스로를 위로했건만 그 과정에서 정작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나를 진짜 행복하게 했는지는 점점 희미해져 버렸다.
물론 행복한 순간도 분명 많았다. 하지만 행복은 늘 너무 빨리 내 곁을 지나갔다. 반면, 고통의 기억은 문신처럼 내 가슴에 남았고, 그때 생긴 무수한 상처의 일부는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못했다. 요컨대 행복의 지속시간은 고통보다 훨씬 짧게 느껴진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나 행복의 크기와 관계없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프로이트가 말했듯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계와 감정을 자기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아주 짧은 고통도 인생 전체를 덮어버릴 만큼 크게 느끼고, 오래 누린 안정감조차 한순간의 좌절 앞에 쉽게 무너지고 만다. 예컨대 줄곧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단 한 번의 고통 앞에서는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삶을 비관해버리고 만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 행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매번 고통 앞에서 좌절하고, 스스로를 탓한다.
시대에 따라 진화를 거듭한 문명사회는 우리에게 ‘괜찮은 삶’의 기준을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부, 명예, 직업, 집안, 학력, 외모.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기준에 도달하면 행복이 쟁취할 수 있다 믿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지만 왜인지 마음은 점점 더 허전하기만 하다.
그렇다. 문명사회가 내세우는 기준은 우리에게 결코 온전한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명은 애초에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감정을 길들이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한 우리의 쾌락은 언제나 통제되고, 고통은 더 두텁게 쌓여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복의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오래도록 머무를 수 있게 하는 내 마음속 행복의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군중 속에서 마음이 유독 허전해지거나,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순간이 당신에게 찾아오면, 그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그렇게 느끼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쩌면 끊임없이 우리를 통제하려 하는 사회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잠시 미끄러질지언정 내 행복의 순간을 꼭 붙들고 놓지 않기 위해, 아주 치열하게 잘 살아내고 있다는 건강함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니까.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