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문명 속의 불만> 마음의 여백을 지우는 사회, 공백을 쫓는 우리
하루에도 몇백 개의 말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아침에 눈을 뜨고 수면 모드가 꺼지면 기다렸다는 듯 각종 푸시 알림이 우수수 쏟아지고, 소셜 미디어에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서로의 마음이 오고 가고, 메시지 창에는 쉴 새 없이 이모티콘이 날아든다. 온종일 많은 대화가 오가며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정작 마음을 울리는 진짜 대화는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는데 정작 내 마음을 관통하는 말은 단 하나도 없어 오히려 텅 빈 구멍이 더 커지는 느낌이랄까.
실로 요즘은 외로움을 논하는 것조차 어색한 시대이다. 어느 순간부터 외로움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 사회를 대표하는 키워드가 되어버렸다. 잘 지내는 척, 괜찮은 척, 바쁜 척을 하다 보면 나조차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잠시 잊기도 하지만 잠시 숨을 돌리려 가만히 멈춰있으면 어느새 공허함이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물론 원한다면 전 세계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으며, 혼자 있는 시간조차 각종 플랫폼과 서비스들이 빈틈없이 채워주는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이렇게 나는 늘 누군가와 분명 같이 있는데,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수많은 대화 속에서도 마음은 더 공허해지는 걸까?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말했다.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생이 고통의 연속이며 자신이 변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대개 인간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 대신 신과 같은 이상적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인간의 소망이 외면화된 결과가 바로 문명이다. 처음엔 문명과 인간도 호혜적 관계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속내를 감춘 허상일 뿐이었다. 인간이 점차 문명에 익숙해지면서 문명과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주종관계가 성립되었고,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도리어 인간의 위에 군림하여 대중을 조종하려 했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문명은 개인의 욕망과 감정을 억제하며, 감정의 표현을 미숙하거나 불편한 것으로 취급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는 감정 표현에 서툴고 야박해졌다.
실제로 누군가가 용기 내어 진심을 전하면 우리는 ‘너무 예민하다'라고 치부해 버린다. 감정 조절을 잘해야 진정한 프로라며, 기껏 용기 낸 자의 진심을 짓밟는 일에도 서슴지 않는다. 덕분에 서로의 진심이 빠진 피상적인 협력 관계는 극도의 효율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골다공증처럼 관계의 기반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로움은 그 공백 속에 스며들었다.
한편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연결을 폭발적으로 확장시켰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 누구와도 말을 걸 수 있게 되었고, 요즘은 인간이 아닌 AI와 대화하는 재미에 푹 빠진 사람들까지 생겼다. 하지만 그런 피상적인 연결이 많아질수록 진심은 점점 더 자취를 감췄다. 겉치레식 인사, 곧 얻어낼 것이 분명한 대화는 확연히 늘었지만, 진짜 마음을 담은 대담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휴대폰 알림 센터엔 "잘 지내세요?"라고 말을 건네는, 내게서 뭐라도 얻어보겠다는 메시지는 지겹도록 넘쳐난다. 하지만 메시지가 쌓이고, 새로운 채팅창이 열릴수록 마음의 문은 더 굳게 닫힌다. 나의 즉각적인 행동 반응 또는 정보 전달만 오고 갈 뿐, 나와 상대를 진정으로 이어주는 교감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최대치는 언제나 소셜 미디어 프로필 소개 세 줄에 머물러 있을 뿐, 섣불리 그 세 줄을 경계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더 깊이 연결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언제라도 부러질 듯한 아주 약한 연결을 통해 순간의 감정만을 공유하고 즉각적인 욕망을 채운다. 따라서 매 순간 수많은 관계는 형성되지만 진짜 친밀감은 없으며,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음에도 그 누구와도 통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빠져버리게 된다.
이처럼 어느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디지털 연결은 본질에 기반한 다양한 교류를 통제하고 모두를 획일화시키는 자기 감시의 형태로 우리를 통제하고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오고 가는 대화를 통해 확인되는 내 존재감은 순간의 도파민만 채워줄 뿐, 곧바로 잊혀 더 큰 자극만을 바라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팔로워는 더 많아지고, 좋아요 수는 넘쳐나고, 댓글은 계속 늘어나며, 스토리로 서로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점점 외로워진다. 기술의 진일보로 우리가 만들어낸 디지털 세상은 결국 우리가 "함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가상 세계이기 때문이다.
연결은 차고 넘치는데 진심은 좀처럼 닿을 수 없는 사회에서 감정을 억압당한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 갇히게 된다. 타인과의 진짜 연결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더욱 스스로의 고립 속으로 빠진다. 이에 외로움은 선택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정 기본값이 되었다. 요컨대 우리는 언제나 여럿이 함께 있지만, 동시에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는다. 단지 혼자이지 않을 뿐이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연결된 외로움’의 본질이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한다. 한 번 올라간 ‘잘 살아야 한다’는 기준은 좀처럼 낮아질 생각을 안 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종종 그 목표를 방해하는, 곧 생산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숨겨할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말하지 않고, 외로워도 내색하지 않은 채 사회가 요구에 따라 침묵한다. 힘들다 말하면 약해 보일까 봐, 진심에 발목이 잡혀 낙오할까 봐. 그래서 모두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끝없는 불안을 견디며, 말없이 외로워한다. 이처럼 문명은 우리에게 삶의 편리를 제공하는 대신, 감정 표현을 통제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발달할수록 감정의 여백은 점점 좁아지고,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굴지 않는 법’을 익히며 살아가게 된다.
특히 기술이 진일보한 사회일수록 감정으로 인한 마음의 여백은 때론 이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유독 생산성과 효율성에 목을 매는데, 감정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보는 암묵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하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한강의 기적 이면엔 기꺼이 삶의 행복의 순간을 바친 개개인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세계를 놀라게 한 눈부신 생산성과 효율성은 사실 우리의 행복과 감춰진 침묵의 대가였음을 사회는 일부러 조명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모든 감정의 여백을 지워 스스로의 삶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잔인한 현실은 전체를 위한 희생이 이제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아서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고통받고, 어쩌면 세계의 원조를 받던 때 보다 더 큰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고독을 강요당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감정을 나누는 문화가 사라졌고, 서로를 돌보는 일은 개인의 책임이 됐다. 사회는 '편의'와 ‘자기 관리’라는 이름 아래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고립시키는 삶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이에 따라 우리는 외로움을 개인의 성향이나 태도로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외로움은 독립적이지 못하고 사회에 낙오된 약한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가장 본질적인 신호이다.
늘 연결되어 있지만 그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끝도 없이 외로운 건 내가 잘못해서도, 당신의 나약함 때문도 아니다. 문명이 우리에게 감정을 나눌 권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즉, 나와 당신의 외로움은 단지 개인의 감정 상태가 아니라, 시대적 구조가 만든 현상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문명은 인간에게 안전을 보장하지만, 동시에 감정을 억누르며 고립을 낳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느끼는 이 외로움은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문명이 생명권 보장, 즉 질서와 안정이라는 편익을 대가로 인간에게 요구한 조건이다. 하지만 그 질서 안에서 감정은 조용히 침묵을 강요당했고, 결국 인간은 더 외로워졌다. 말하자면 외로움은 개인의 결핍이 아니라 문명이 만들어낸 일종의 사회적 정서이자, 그 자체로 회복을 향한 구조 신호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술에 의한 더 많은 얕은 연결, 더 빠른 응답, 더 효율적인 대화가 아니다. 생활을 윤택하게 만든 기술은 끊김 없는 연결, 더 많은 소통과 효율적인 욕구 충족을 가능하게 했지만 외로움의 근원, 즉 깊이 있는 교감, 마음의 여백을 느끼는 느림의 미학이나 진심과 본질을 건드리는 대담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외로운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와도 벗어나려 발버둥 치거나 애써 숨기면서 그 감정을 억지로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건 오히려 우리가 이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연결이 단절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되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무언가에 쫓기듯 마음의 공백을 채우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 부담은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모든 삶의 순간을 깜지 채우듯 빽빽이 채우지 않아도 내 삶은 이미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그 여백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각자의 고독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까.
나의 외로움은 치열한 삶의 증거이다.
그러니 마음의 공백을 채우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진정한 연결은 오직 그 여백을 온전히 느끼는 시간에서 시작된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