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 다시 멕시코 #0. prologue
지금까지 내가 여행하기도 하고, 봉사활동을 가기도 하고, 공부하기도 하고, 살아보기도 하고,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던, 의미 있는 추억들이 묻어있는 나라의 수이다. 많지도 않지만 적지도 않은 나라를 여행했기에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았다.
”다녀왔던 나라 중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어?”
나는 2-3초간 고민에 빠진다. 나라마다 매력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도 있고, 마냥 멍 때리며 휴양하기 좋은 곳도 있고, 여행의 매력보다는 살고 싶은 곳도 있고, 한 입을 먹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식도락 여행이 목적인 곳도 있고, 선호하는 것이 가슴 뻥 뚫리는 바다인지 장엄함 앞에 그저 숨 멎게 만드는 산인지, 불빛 찬란한 도시인지 풀벌레 소리가 정겨운 시골인지 어느 것이 기준인지에 따라 너무 다른 걸…
그리고 되묻는다. “어떤 여행을 좋아해?”
질문한 사람의 취향에 맞는 나라에서의 추억을 머릿속으로 더듬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나'의 생각보다는 ‘너'의 생각과 연결되는 부분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멕시코를 다녀온 이후로, 그런 고민의 시간은 확연히 줄어들었고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말함에 조금은 거침이 없어졌다. (물론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멕시코가 최고야!라는 말은 아니다. 아직도 가보지 못한 세상은 넓고 내가 여전히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각 나라마다의 모습들이 있으니까)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멕시코를 잘 알지 못했고 크게 관심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대부분이 익히 알고 있는 큰 밀짚모자와 선인장, 그리고 데낄라의 나라 정도.
아, 애니메이션 코코 이후로는 해골도 포함!
멕시코 땅을 밟아보기 전인 2019년 7월, 나는 R과 5년째 만나는 중이었다. 당시 우리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14시간의 시차를 오가는 장거리 만남을 1년간 지속해오면서 (그동안 한번은 태국에서, 한번은 미국에서 만나 여행했었다) 우리 관계를 지속해나갈지 아니면 서로 다른 미래를 존중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 나서야 할지 진지하게 대화해보고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R은 내가 미국에 와서 함께 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한 남자 때문에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옮길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무작정 낯선 땅에서 그만 바라보며 삶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아마도 그만큼까지의 믿음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내가 미국에서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며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안했다. 예를 들면, 대학원을 다니며 나만의 네트워크도 만들고 기회를 찾아보면 어떻겠냐고. 실제로 5개가 넘는 대학교들을 방문해서 입학 상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미국에서의 내 삶이, R과 함께하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이 아닌 제3의 국가에서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해볼까도 했지만 둘 다 외국인으로서 0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았다. 7년간의 한국 생활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지난 1년간 쌓아온 것들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그려 나갈 미래를 위한 준비에 만족하고 있는 R의 모습이 보였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도 그는 본인이 무엇을 잘하는지 잘 알기도 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서 만들어가고 있었다. 대단했고, 섹시하게 멋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와 함께 있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그려가고 싶은 미래의 간격을 좁히지 못했고, 함께한 5년이라는 시간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이별의 대화를 주고받은 순간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나는 더 이상 R의 집에 머물 수 없었고 갈 수 있는 곳은 호텔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미국의 어딘가를 여행할 마음은 크게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막막했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는 비행 편이 LA에서 출발하는 거니까 미리 서부로 가 있을까 생각도 했다. 그러다 문득 교환학생 시절 제일 친했던 친구가 시카고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고, 그렇게 갑작스러운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U, 잘 지냈어? 내가 지난번에 남자 친구 보러 미국 온다고 했던 거 기억나? 나 지금 미국이야. 이런 일로 갑자기 연락해서 너무 미안해. 그런데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나 지금 이런저런 상황으로 이별했어. 더 이상 그의 집에 머무를 수 없는데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혹시 너 아직도 시카고 근처에 살아? 괜찮으면 나 너희 집에 며칠만 머무르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마음 좀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밤 11시가 넘는 시간이었음에도,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불구하고 U는 내게 바로 전화해 이렇게 말했다.
“물론이지!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운걸. 물론 이런 일을 계기로 만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나 지금은 시카고 근처 Rockford에 있어. 내일 당장 와. 우리 집 주소 메시지로 보내 둘게. 그리고 알지? 네가 있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도 돼.”
눈물이 핑 돌았다. 지구 반대편의 낯선 땅에도 마음 누일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낯선 사람이 되는 과정이 조금은 덜 외롭고 덜 아팠다.
그렇게 다음 날 Rockford에 도착해서 친구와 만났다. 함께 산책도 하고, 스쿼시도 치고, 로컬 마켓에서 수제 맥주도 마시고, 요리도 해 먹고, 친구의 친구들과 함께 파티하며 일주일이 좀 넘는 시간을 보냈다. 많이 먹고, 많이 자고, 많이 웃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마음을 빨리 추스를 수 있었다.
멕시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토록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 든 이유는 2019년 여름휴가를 R과 함께 보내려 했던 곳이 칸쿤, 멕시코였기 때문이다.
함께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지만, 가려했던 그 나라가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선택하기보다 혼자라도 가봐야겠다 싶어 다시 배낭에 짐을 구겨 넣었다. (아 참, 여담이지만 캐리어가 아니라 배낭인 이유는 미국에 오기 전 아프리카 로드 트립을 했기 때문이다. 배낭의 무게 = 내가 짊어질 삶의 무게라는 말이 정말이다. Anyway!)
5년간의 연애를 끝낸 후 무작정 달려간 나라, 아무런 계획 없이 도착한 칸쿤은 따뜻한 옥색 바다로,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미소 짓게 만드는 타코로, 절로 어깨를 흔들게 만드는 음악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굳어있는 나의 마음을 조금씩 따스하게 풀어주려는 듯.
어쩌면 멕시코와의 첫 만남 자체가 예사롭지 않아 조금 더 애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로 온전히 있어도 편안한 곳.
내 안의 좋은 에너지를 더 많이 끌어내 주는 곳.
매사에 진지한 내게 삶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해 준 곳.
100m를 걸어 들어가도 허벅지를 넘지 않는 잔잔하고 따뜻한 바다 물결을 느끼게 해 준 곳.
고래상어에 이끌려 바다 깊이 따위는 잊은 채 뛰어들어 수영하고, 5m 높이에서 다이빙하게 해 준 물 공포증이 있는 쫄보에게 용기를 준 곳.
모차렐라 치즈보다 맛있는 queso Oaxaca(와하카 치즈), 클럽에서 free drink로 주는 값싼 데낄라로 데낄라를 처음 접한 내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온 mezcal(메즈칼, 애정을 담아 메즈칼리또mezcalito라고 부른다. 데낄라와 동일한 아가베로 만들지만 조금 더 우디(woody)하고 꽃향과 과일향이 남), nopal이라는 선인장의 가시를 잘라내고 구워서 소금+라임즙을 짜 먹는 맛, 진짜 타코의 맛(아침/점심/저녁/해장 타코까지!)을 알게 해 준 곳.
멕시코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 LA→한국행 비행 편을 취소하고, 다시 끊은 멕시코→한국행 비행 일정을 두 번이나 미뤘다. 그렇게 7개월이라는 시간을 살듯이 여행했고 더 있고 싶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부모님이 나만큼 안전불감증이었다면(멕시코가 코로나로 국경을 닫아서 어쩔 수 없이 멕시코에 더 있으면 좋겠다며 코로나를 조금은 우습게 생각했던 나였다)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뭐, 인제 와서 소용없는 생각이지만 이런 유치하고 막무가내인 상상은 가끔 해볼 수 있으니까!
떠날 때 다시는 못 올 거라는 생각보다 ‘나는 다시 올 거니까’라는 생각에 조금은 덜 서운했었는데 다시 가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멕시코로 가기 전, 멕시코에서 느낀 첫 느낌과 공기, 내가 멕시코에 빠져들게 된 이유를 이렇듯 다시 곱씹어보게 되었다.
이번에 멕시코에 가면 경험하고 느낀 모든 크고 작고 중요하고 사소한 것들을 그냥 흘려보내기 싫은 마음과, 이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날것으로 공유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번 <그웬의 로우또츠 Vol.1 다시 멕시코>의 프롤로그를 마무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