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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견과상념 Mar 28. 2024

뉴욕에서 오래된 습관과 이별하고 잊혀진 언어와 재회하기

봄이 온 뉴욕. 꽃나무가 저마다 꽃망울을 낼 동안 나는 무엇을 해내었나

 언젠가부터 대단하게 새해 목표를 세운다기보다는 그 해의 기조를 세우고 있다. 몇 년간 작심삼일을 반복한 끝에 새해 목표를 아무리 오타니의 만다라트 기법을 사용해 촘촘하게 세워봤자 짧으면 2주, 길어야 한 달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전략을 바꿔서 연말 즈음에 다음 해에 내가 견지하고 싶은 태도, 혹은 기조를 정하고 거기에 맞게 무언가를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의 기조는 ‘성취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크고 작은 성취를 누리고 축하하자’였고, 2024년의 한 분기가 지나고 있는 3월 말, 지난 3개월 간의 작지만 의미 있었던 뉴욕에서의 이별과 재회 두 가지를 기록해보고자 한다. 


옷 쇼핑, 이제 우리 그만 헤어져


 작디작은 맨해튼의 스튜디오 (우리나라로 치면 원룸)에서는 공간활용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오피스텔처럼 기깔난 붙박이 옷장이 있으면 좋으련만, 내게 주어진 벽장 공간은 한없이 작아서 옷을 수납하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다. 집요한 써칭 끝에 최대한의 공간활용을 위해 침대 하단 부분이 전부 서랍장인 이케아 침대를 사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침대를 조립할 때 침대 헤드와 프레임에 더해 서랍장 네 개를 조립하느라 성인 세 명이서 꼬박 몇 시간을 내리 고생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그 조립을 도와준 S와 H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혼돈과 카오스 그 자체였던 침대 조립 현장. 어언 2년전이다.


 처음 미국에 올 때도 사계절 옷을 다 떠안고 오느라 갖은 고생을 했는데, 소비의 나라 미국 답게 두 번의 블랙 프라이데이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각종 이유를 갖다 붙인 세일 (봄이면 봄이라고 세일, 개학하면 개학한다고 세일…) 그리고 매우 정교하게 타겟팅된 인스타그램 광고를 지나치지 못하고 옷을 사재끼다보니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침대 밑 서랍이 110% 수준으로 꽉 차버렸다. 그래도 굳이 핑계를 대보자면 뉴욕에 오면서 한국에서는 전혀 입을 일이 없었던 행사용 원피스들과, 주말에 놀러 나갈 때 입는 소위 night out top이라고 불리는 훌러덩 까진 옷들(이래 봤자 유교걸인 나한테는 끈나시 정도나 약간의 오프숄더가 전부다)을 좀 살 필요가 있긴 했다. 그래도 테니스를 치는 양에 비해 너무 많은 테니스 원피스와 이고 지고 왔지만 정작 잘 안 입게 되는 한국 스타일 옷 등이 더해져서 서랍이 옷을 토해낼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3월까지 단 하나의 옷도 사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나의 이메일 인박스에 출몰하는 Rag & Bone의 60% 할인은 매력적이고, 우편함에 꽂히는 Macy’s (미국 최대 백화점 체인)의 샘플 증정 전단지도 괜히 뜯어보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과연 적응의 동물이었다. 옷을 사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으니 이렇게까지 맞춤으로 나의 구미를 당길만한 옷들을 보여줄 일인가 싶어 자꾸만 눌러보고 충동구매로 이어졌던 인스타그램 광고에도 조금 무던해졌고, 액션을 취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하나 걸러 하나씩 뜨던 각종 쇼핑몰 광고들도 약간 줄었다. (대신 자꾸 무슨 벽 필라테스 앱이 광고로 뜬다. 아 안 한다고요!) 집 근처에 매장이 있어 방앗갓처럼 드나들던 윌슨과 룰루레몬에서 아무리 세일을 해도, 터져나가는 내 운동옷 서랍을 떠올리며 조용히 소비욕을 삼켰다. 



이런 이메일 디엠에 자꾸 넘어가는 사람은 나뿐인걸까 



 언제나처럼 시간은 성큼 지났고 용케도 나는 3월까지 옷, 액세서리, 신발을 포함한 의복류에 단 1달러도 소비하지 않았다. 해봤더니 생각보다는 할 만했고, 이 개인적인 챌린지의 주된 동기는 아니었지만 패스트 패션 등을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발톱의 거스러미만큼이나마 환경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슬쩍 뿌듯했다. 이제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봄이고, 그만큼 가볍게 살 수 있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나 색감이 쨍한 팔찌 등이 내 눈을 사로잡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로잡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약속한 3월은 지났지만, 어디까지 연장할 수 있는지 보자라는 마음으로 지갑에 힘을 꽉 주고 조금 더 참아볼 예정이다. 아, 그리고 옷 구매를 줄이고 싶은 사람들은 나처럼 물리적인 공간의 제약을 세게 걸어놓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보다시피,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이다. 



중국어,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중국어를 생각하면 미련이 남은 전 애인을 떠올리듯 마음이 시큰하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구애이기에.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내신 과목으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1년을 꼬박 배웠다. 그땐 인생에서 가장 성실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던 시기였으므로 당연히 중국어 내신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외고 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대학 입시에서 희망하는 과에 지원하는 것처럼 외고 입시에서도 중국어과, 일본어과, 독일어과, 불어과 등 여러 과 중 원하는 전공을 골라 3 지망까지 쓸 수 있었다. 


 예민한 감수성의 16살에게 중국어는 결코 매력적인 언어는 아니어서 나름 머리를 쓴답시고 1 지망이었던 불어과를 2 지망에 써내며 대학 입학할 때쯤 불어의 각종 섹시한 발음을 유창하게 해내는 나를 꿈꿨다. 하지만 내가 나를 과소평가했던 건지(?) 칸 채우기에 불과했던 1 지망 중국어과에 합격을 해버렸고 그렇게 중국어와의 불행한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입학을 하자 외국어 고등학교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당히 많은 시수가 전공어인 중국어를 배우는데 할애되었다. 중국어 1, 2부터 시작해서 학년을 올라가며 중국어 독해, 회화, 문법 등으로 수업이 다양화 및 심화되었고 나는 내가 중국어와 달리 영어를 어려서부터 배운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암기력이 좋지 못해 영단어 외우기도 버거웠던 내게 특정 주제에 대한 진도를 나갈 때마다 그 주제에 대한 여러 장의 단어 프린트물이 더해지는 학습량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선생님, 시장에서 과일 주문하는 법을 배운다고 새로운 과일 이름 50개가 적힌 프린트물을 외워오라고 주시면 어떡하시나요… 과일은 shuiguo, 사과는 pingguo... 거기에 공부 깨나하는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변별력을 위해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병음 하나, 성조 하나만 다른 보기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고 나의 컴퓨터용 사인펜은 시험 때마다 OMR 카드 위에서 한없이 방황했다


 결국엔 중국어 학원까지 다니고, 겨우겨우 중국어 능력시험인 HSK도 어떻게 보긴 봤지만 (그나마도 같은 중국어과 친구들이 다 6급을 딸 때 난 겨우 4급을 땄다. 이 때는 구 HSK라 급수가 높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2학년 2학기 때쯤부터는 도저히 시간, 노력 대비 성적도 좋지 않고 학습량이 감당이 되지 않아 시나브로 중국어를 놓아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종 중국어 내신은 6-7등급을 받으며 착실히 친구들을 받쳐주였고, 심지어 전국구 단위의 수능까지 4등급을 맞아버리는 참패 끝에 중국어는 상처만 남긴 채 나의 전두엽 뒤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매몰비용일지언정 영어 이후에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대로 배워보려고 시도한 언어인 중국어를 마냥 묻어두긴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뉴욕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들이 그들에게 제2 외국어인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고 언어 교환 등 다양한 방법으로 꾸준히 배우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동기부여가 되었다. 각종 학습지나 온라인 강의도 생각해 봤지만 처음 몇 번 하다 말 것이 뻔해, 새로운 접근법을 고민했다. 그러다 올해 1월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 친구의 추천으로 듀오링고를 시작하게 되었다. 


듀오링고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900만명이 중국어 모듈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인기있는 스페인어 학습자는 4300만명..

 

 듀오링고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습 앱 중 하나로 매우 다양한 언어의 학습 모듈을 무료로 제공한다. 다만 무료 버전은 광고를 봐야 하는데 광고를 보기 싫다면 유료 버전에 가입할 수 있고, 패밀리 플랜을 구매하면 최대 6명까지 인당 연간 2-3만 원의 나름 합리적인 가격으로 광고 없이 앱을 이용할 수 있다. 


 언어와 본인의 레벨을 선택하면 약 5분 분량의 짧은 학습 모듈이 주제, 난이도에 따라 진행되고 나름 단어 연습, 문장 연습, 주기적인 복습 등이 잘 짜여있어 별생각 없이 쭉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는 모든 학습, 운동 등의 ‘갓생’ 앱에 디폴트로 포함되어 있는 gamification(게임화)과 social (소셜) 기능 또한 섭섭지 않게 더해져 있어 며칠 연속 학습, 일주일마다 경험치 달성시 레벨업, 친구와 퀘스트 함께 하기 등 적당한 소셜 프레셔를 느끼며 게임 같이 소소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장치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왼쪽부터 차례로 친구와 함께 하는 미션, 내가 지금까지 모은 뱃지, 그리고 내가 속한 리그. 게임에서 경쟁심을 자극하고 중독성을 갖게 만드는 거의 모든 부분을 차용한 것 같다.


 그중 나를 포함한 듀오링고의 많은 이용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단연 연속 학습일이다. 매일 5분이라도 투자해 한 개 이상의 모듈을 끝내면 연속 학습일 수를 계속 연장해 나갈 수 있는데, 유료 아이템을 쓰지 않는 이상 하루라도 모듈을 끝내지 않으면 숫자가 초기화되어버린다. 나는 1월부터 시작해 지금 72일째 연속 학습일을 달성하고 있는데, 자칫 하루를 깜빡해 이 숫자가 초기화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진다


72일째 듀오링고 중!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연속 학습일에 대한 약간의 집착과 함께 적어도 매일 5분이나마 중국어에 투자할 수 있었다. 물론 전체 언어 학습앱 1위 앱답게 한 번 앱을 열면 학습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한 장치들 (10분 더하면 경험치 추가 보상! 친구와 함께 3월 퀘스트를 완료하세요! 이 추세라면 다음 주에는 낮은 리그로 강등됩니다! 등등 아주 각종 당근과 채찍이 좋은 의미로 살벌하다) 이 곳곳에 있어 보통은 10-15분 내외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 연속 학습일 연장을 위해 듀오링고에서도 하루에 몇 번씩 집요하게 알림이 오는데, 그 때문에 듀오링고에 관한 재밌는 밈도 많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듀오링고 관련해서 재밌게 봤던 짧은 유튜브 영상 하나를 첨부한다.  


학습 모듈의 일부. 나름 듣기, 말하기, 쓰기 등이 고루 잘 분포되어있다.


 스마트폰으로 오락과 정보의 사이에 있는 글이나 영상을 멍하니 보며 그래도 유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라며 애써 정당화할 필요 없이, 순수하게 학습에 투자한 시간이 조금이나마 n시간의 스크린타임에 꼬박 72일동안 기여했다. 우선 최대한 연속 학습일 수를 보존해 나가는 게 목표이긴 한데, 쌓여가는 학습일 수와 함께 중국어 실력이 얼마나 늘까 궁금하다. 과연 나는 중국어 내신 7등급에 빛나는 ‘중포자’의 불명예를 마침내 떨치고 내 전두엽 뒤안길로 사라진 중국어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 외에도 3월에는 굵직한 마일스톤이 많았다. 별도의 글로 기록한 두 번째 하프마라톤을 서브 2 (두 시간 이내 완주)로 완주했고, 미뤄오던 미국 연말정산을 10시간 걸려서 처음 내 힘으로 해냈고 (물론 뭐 잘못신고해서 벌금 내는 거 아닌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새로 바뀐 업무에서 스트레스성 간식 먹기와 며칠 밤의 야근을 거쳐 첫 번째 발표를 끝냈다. 물론 새로운 일이라 여전히 상수보다는 변수의 비중이 지배적이고 여전히 나는 과연 내 일이 의미가 있을까, 나라는 사람은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가에 대한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의심이 들 때마다 그게 일에서 비롯되었든 관계에서 오는 회의감이든, 내가 알알이 이뤄온 작은 성취를 발판 삼아 그 가면에게 들이대봐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니 내 누군지 아나? 내가 인마! 70일 동안 하루도 안 빼먹고 으이? 듀오링고 한 사람이야! 어저께도! 으이? 중국어 배우고! 그 와중에 옷도 하나도 안 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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