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박 7일 간의 옐로스톤 & 그랜드 티톤 여행기..는 아닌 여행감상문
6월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일주일 넘게 휴가를 다녀왔다. 목적지는 옐로스톤 국립공원. 옐로스톤은 서울 15배 크기의 위용을 자랑하는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뉴욕에서 솔트레이크 시티로 약 다섯 시간 비행기를 타고, 다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여섯 시간에 걸쳐 운전한 끝에 옐로스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난한 이동이었지만 꼬박 일주일 동안 옐로스톤과 그 근처에 머무르며
나는 새로움이 주는 환기가 과거에 대한 상기와 만나 현재의 나를 확장시키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뉴욕에서 이방인이다. 하지만 뉴욕에서 매일의 일상을 꾸려나가다 보니 누군가에겐 영감의 원천 혹은 경탄의 대상이었을 허드슨 강가의 자전거길, 센트럴 파크에서 보이는 뉴욕의 스카이라인, 브루클린 브릿지 너머의 자유의 여신상에도 예전만큼 눈길이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옐로스톤에서는 뉴욕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만나기 힘든 풍경들이 줄지어 펼쳐졌다. 하루는 산과 강에, 또 다른 하루는 간헐천과 온천에, 다음날엔 호수와 협곡에 발을 디디며 매일 새로운 행성을 방문하는 것 같은 날들을 보냈다.
물론 풍경 자체도 압도적이었지만, 새로움이 주는 환기는 단순히 풍경이 아름답고 간헐천이 신기하다는 일차원적인 감상을 넘어, 뇌의 장기 기억에 깊이 파묻혀 있던 단어들을 우물에서 물을 퍼내듯 표면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단어들은 표면에서 표류하고 있던 개념들과 연결되었다.
나무의 바다, 수해(樹海)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침엽수림을 보자 최근에 거의 사용할 일이 없었던 ‘울창하다’, ‘우거지다’ 등의 단어가 떠올랐다. 울창함과 우거짐을 시각화한다면 바로 이것이겠다 싶은 풍경이 강하게 내 시각중추를 자극했고, 문득 떠오른 그 형용사들은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명사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나무가 아니라 ‘생각’이 우거진다면 어떤 느낌일까.
나무의 몸통에서 가지가 자라나듯이 생각이 원류를 타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누군가의 다른 생각과 가지를 맞대다 방향을 전환하기도 하는 생각의 흐름이 떠올랐다.
‘근심’이 우거진다면 어떤 모양일까.
각각의 근심은 한 장의 나뭇잎처럼 얇을 수 있지만, 여러 근심이 겹쳐져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어딘가에 깊게 뿌리내리고, 마침내는 일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모양새가 그러졌다.
애정이 울창하다면, 미움이 우거졌다면, 슬픔이 우거진다면 - 그건 어떤 형태일까.
자주 사용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 굳이 그려보지 않았던 개념들은, 신선한 시각적 자극이 깊은 곳에서 퍼올린 단어와 만나 물상(物像), 즉 눈에 보이는 물체의 생김새나 상태가 되었다.
그린듯한 풍경은 나를 미술관으로 데려다주기도 했다. 쾌청한 하늘을 그대로 반사해 푸른색 잔물결이 일었던 호숫가의 한가로운 두 낚시꾼은 요시고의 <따뜻한 휴일의 기록> 사진전을 떠올리게 했다. 옐로스톤 강의 폭포와 협곡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아티스트 포인트’에서는 해를 살짝씩 가리는 구름의 위치에 따라 절묘하게 색감이 바뀌는 회백색, 분홍색, 암갈색의 협곡이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을 연상시켰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순간들도 와락 일어났다. 그랜드 티톤 산등성이에 흐드러지게 핀 노란 들꽃은 수년 전 갔던 알프스 산맥의 한 자락을, 호수에서 탄 카누는 시애틀에서 처음 사귄 외국인 친구들과 카누를 탔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보통의 일상에서 현재는 빠르게 과거가 된다. 그날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다음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주말을 계획하다 보면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다. 벨트 위에서 다가오는 다음의 현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나는, 과거의 현재에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다.
여행을 떠나며 비로소 컨베이어 벨트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나는 벨트 위를 거꾸로 걸어가며 너무 빨리 지나쳐간, 혹은 잊혔던 순간과 단어들을 수집해 본다. 소복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현재로 데려온 수집품들은 그 자체로도 어여쁘다. 나는 잊혀졌던 수집품들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고, 그 목걸이는 나의 일상에 사소하지만 입체적인 즐거움을 더해준다.
여행이 가져다 준 환기와 상기의 만남,
그 만남이 이어준 나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나는 스스로의 밀도를 조금 더 높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