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틀렸는데 지금도 틀렸다

'외 못 헤?'가 아니라 당연히 못 하는 거였다;

by 그웬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입봉을 힘들게 만든 건 나 자신이었다. 45분 물의 입봉을 제안받았을 당시 놀랍게도 20분 물 메인작가 자리도 제안받았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나. 처음으로 그것도 45분 물을 구성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가시밭길인지 몰랐던 나는 20분 물 메인작가 제안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비극이지만 당시의 나는 뉴스레터 작가도 겸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20분 물은 6주에 걸쳐 '매주' 방송을 내보내야 하는 어마어마한 스케줄이었다.


※여기서 잠깐
대부분의 방송은 매주 나가지 않나요? 맞습니다. 맞지만,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 보통 적게는 2팀, 많게는 7~8팀까지 존재합니다. 이 팀들이 돌아가면서 한 편을 제작하게 됩니다. 만약 팀이 2팀이라면 제작 기간이 2주인 거고 8팀이라면 제작 기간이 8주인 거죠. 그렇다면 매주 방송이 나가야 한다는 말은 곧, 팀이라고는 우리 팀뿐이며 한 편당 주어진 제작 기간은 1주일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때는 생각했다. 외 못 헤? 못 하진 않았다. 다만, 못했다. 적당히도 아니고 엄청나게 못했다.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구성이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막내 작가가 서브 작가를 건너뛰고 메인작가를 맡아서 6주 텀 45분 물과 1주 텀 20분 물을 병행하는데 거기다 주 3회 발행하는 뉴스레터까지 쓴다? 1+1=2처럼 3개 다 망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얼마나 망했는지 심도 있게 알아보자. 우선, 45분 물 프로그램 A. 다행히도 결과물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망하지 않았다. 이유는 함께 한 피디님 덕분이었다. 14년 차의 그는 불만이 많은 투덜이였지만, 정이 넘치고 의리가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입봉 작가를 데리고 업고 가줬지. (1편에서 언급한 내 입봉을 책임진 이피디가 바로 이 피디다) 하지만 나는 망했다. 우선 적절한 아이템을 찾지 못해 엄청나게 헤맸다. 이건가 싶어서 가져가면 아니었고 저건가 싶어서 가져가면 역시나 아니었다. 주요 시청층이 좋아할 만하면서 그림이 다양하고 섭외가 가능한!


이게 처음 들으면 뭘 가져오라는 건가 싶지만, 하다 보면 대략적인 견적이 나온다. 이건 45분 분량이 나오겠다, 그림이 이렇게 나오겠다, 시청률이 이 정도 나오겠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견적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제 입봉했는뎁쇼? 그러니 그냥 양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안다는데 똥 맛이 뭔지, 된장 맛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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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이건 이런 맛이고… 저건 저런 맛이군요.
그래서, 뭐가 된장이죠?


아이템을 얼마나 못 찾았냐면 촬영 전날 밤 9시에 아이템을 교체하고 밤 10시에 섭외를 마무리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섭외에 성공했으니까 완전히 망한 건 아니지만, 촬영 전날까지 미친 듯이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아이템을 찾았으나 다 빠꾸 당하고 결국 피디님이 찾은 아이템으로 가는. (섭외도 피디님이 해왔다…) 그러니 나의 무능력함을 온몸으로 절절하게 느껴야만 하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그렇다면 20분 물 프로그램 B는 어떠했는가. 여기는 더 했다. 여기는 정말로 피디님이 나를 업고 갔다. (따사로운 햇살 같은 봄피디님, 잘 지내시죠? 항상 사랑합니다) 여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냥 피디님이 나를 업고 갔기 때문이다. 언젠가 입봉하는 피디와 팀을 이루게 되면 나도 피디를 업고 가겠노라, 다짐할 정도로 그녀는 묵묵히 나를 업고 갔다. 매번 그녀에게 짐이 될 뿐이었던 나는 또다시 나의 무능력함을 온몸으로 절절하게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아직 ‘레터’라는 희망이 남아있지 않나! 레터는 사실 못할 수도 없고 입봉과도 관계없으며 그냥 쓰면 되는 거였기 때문에 미치게 바쁜 와중에 시간을 잡아먹는 친구 정도였다. 프로그램 2개에 연달아 얻어터지면 레터를 통해 작디작은 성취감을 얻어 멘탈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이걸 다 할 수 있냐고 물으신다면, 네! 가능합니다! 잠을 안 자면 됩니다 :) 당시 스케줄이 어떠했냐면, 사실 스케줄이랄게 없었다. A를 하다가 B를 하다가 레터를 쓰다가 다시 A, B, 레터. 무한 굴레 안에 갇혀버린 나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밥 대신 과자로 끼니를 때웠다. 침대에 누우면 일어나지 못할 거 같아 노트북 앞에서 일하다 일하다 지쳐 퓨즈가 나갈 때쯤 거실 불을 켜놓고 소파에서 쪽잠을 잤다. 촬영 중에도 원고를 써야 하고 레터를 써야 해서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혹은 서서 노트북을 들고 자판을 두들겼다.


사람이 이렇게 온종일 일만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노트북 앞에서 보냈다. 잠을 자지 않으니 억겁 같은 하루가 지나가면 다시 영겁 같은 하루가 시작됐다. 돌아보니 그 시절의 내가 익힌 건 놀랍게도 '메인작가가 되는 법'이 아니라 버티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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