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귀복 Feb 04. 2024

16. 천재작가, (다시) 원고 투고

무명작가 에세이 출간기

출판인들은 엄청난 속독 능력을 자랑한다.


A4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원고를 20분 만에 전 편집팀원이 꼼꼼히 읽고 검토하며 심지어 회신까지 한다. A4 기준 시간당 30페이지 정도를 겨우 읽는 내 기준에서는 마냥 부럽기만 한 능력이다. 그중에서도 출판사 연 매출 기준 상위 30위 안에 매년 이름을 올리는 전통 있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한 명이 단연 으뜸이다. 그가 보내 준 답변 메일을 아래에 공개한다.


안녕하세요, 0000사 편집부입니다.

저희 출판사에 관심 가져 주시고 소중한 원고를 투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내 주신 원고를 살펴보았습니다만, 저희 출판사의 출간 방향과는 맞지 않아서 출간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뜻이 맞는 출판사를 만나서 좋은 책으로 만들어지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이 남성은 투고된 원고의 이메일 본문을 읽고, 파일을 열어 원고를 확인한 뒤, 검토를 마치고 친절히 회신까지 보낸다. 직업 정신이 매우 투철하다.


"심지어 그는 이 모든 과정을 1분 이내해낸다."


편집자의 탁월한 업무 능력에 출판사 대표는 박수를 쳐주고 싶겠지만, 원고의 채택을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던 천재작가에게는 커다란 상처로 가슴에 남는다. 사용 중인 이메일은 분 단위로 기록을 확인할 수 다. 수신 확인 시간과 답변 메일 발송 시간이 정확히 일치하는 사실로 미루어 복사와 붙여 넣기로 대충 처리했다는 확신을 얻는다. 다만 그가 정확히 몇 초만에 이 가지 과정을 모두 끝마쳤는지는 알 수가 없다. 속상하긴 하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넓고 출판사는 많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두 번째 원고 투고를 준비하면서 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뀐다. 겸손함을 장착하고 편집자를 이해하려 노력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  잘못이다. 쁜 사람 붙잡고 "저기요, 잠깐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으세요?" 하고 물은 건 나다. 남의 탓을 할 이유가 없다. 매력 없는 내 원고가 문제다. 그는 분명 나를 돌아보았으나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머리도 안 감고 리닝 입은 채로 슬리퍼 질질 끌면서 데이트 신청을 하니 거절당하는 게 당연하다. 신고 안 당한 게 다행이다. 마찬가지다. 편집자가 파일을 열어보지도 않을 형편없는 제목과 기획으로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다. 원고 투고 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이유.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고 했다. 원고 채택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편집자와 출판사 대표들이 어떤 원고에 관심을 알아야 한다. 고민 끝에 해답지를 꺼내 든다. 그들이 쓴 책들을 찾아 읽는다. 헉! 두세 권 읽다 보니 천재작가의 원고는 채택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다. 상태가 심각하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빠른 문제 해결을 위해 독서량을 급격히 늘린다. "원고 투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도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출간하고 싶습니다"라는 반가운 회신 메일을 받을 때까지 매일 2시간씩 독서를 이어간다.


편집자의 사생활 (고우리, 미디어샘, 2023)
날마다, 출판 (박지혜, 싱긋, 2021)
이것도 출판이라고 (김민희, 더라인북스, 2020)
출판하는 마음 (은유, 제철소, 2018)
출판사 에디터가 알려주는 책쓰기 기술 (양춘미, 카시오페아, 2018)
읽는 직업 (이은혜, 마음산책, 2020)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 (박보영 & 김효선, 예미, 2020)
출판사 하고 싶을 때 읽는 책 (김흥식, 도서출판그림씨, 2021)
중쇄 찍는 법 (박지혜, 유유, 2023)
카피책 (정철, 블랙피쉬, 2023)

~~~

~~~

~~~


위 목록을 포함하여 총 36권을 읽었다. 넉넉히 세 달 정도 걸렸다. 편집자의 시선에서 보니, 내 원고는 쓰레기가 분명하다. 출판사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과 자본을 쏟아부을 가치가 전혀 없다. 더 나은 대안이 너무나 많다. 적자가 보장된 무명작가의 글에 선뜻 "저희가 계약하고 싶습니다" 하고 나설 출판사가 없는 게 당연하다.




"천재작가에게 포기란 없다. 다시 도전을 시작할 시간이다."


독서를 통해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 분위기 파악은 끝났다. 이제는 실전이다. 출간이 아니라 '편집자가 원고 파일을 열게 만들기'로 목표를 수정한다. 1차 관문 통과 이후에 2차를 고민해도 늦지 않다. "휴~" 이제야 숨통이 조금 트인다.


"예비작가가 넘어야 할 1차 관문은 편집자다."


대한민국 편집자들 웬만한 대기업 직장인들보다 훨씬 더 바쁘다. 원고 편집과 기획, 수시로 있는 회의와 회식, 작가 관리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숙취와 피로가 일상인 와중에 투고 메일을 검토한다. '구입한 로또의 번호를 지급 기한 내 확인하는 심정'으로 잊지 않고 메일함은 열어 본다. 고로, 편집자는 투고 원고 검토에 긴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다.


"원고 투고출간으로 이어질 확률은?"


예비작가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들을 읽다 보면 원고 투고가 책으로 이어지는 게 쉬운 듯하나 현실은 다르다. 사기꾼들 말에 속지 않기를 바란다. 인세를 받아 주머니를 불리려는 속셈이다. 위에 적어놓은 책들을 읽고 생각보다 문제가 더 심각하다. 한 달 평균 100여 건의 투고 메일을 10년 동안 검토한 편집자 한 명은 3개의 원고를 책으로 출간했다고 밝힌다. 수학을 싫어하지만 계산기를 꺼내 든다.


12,000건 중 3건. 출간 확률이 0.025퍼센트다.


이는 양반이다. 또 다른 편집자는 매달 100여 건의 투고 메일을 5년간 확인했지만 출간은 한 건도 안 했다고 한다. 


6,000건 중 0건. 윽! 0퍼센트다.


두 사례를 더해보자. 수포자가 수학을 계속하려니 퇴고보다 더 힘들지만 글은 팩트가 생명이다. 사실 확인을 위해 고통을 무릅쓰고 계산을 이어간.


합산해 보면 18,000건 중 3건. 출간 확률이 0.017퍼센트다. 심지어 반올림한 수치다.


이처럼 원고가 출간으로 이어지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바늘구멍을 통과해야만 한다.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이  쉬어지는가? 걱정하지 마라.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리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다. 투고가 100번이면 확률은 1.7퍼센트로 올라가고, 200번이면 3.4퍼센트로 올라간다. 1,000번이면? 후훗! 노력은 언제나 희망을 키운다.


"천재작가는 시선을 사로잡는 투고를 준비한다."


속에 모든 답이 있다. 관련 분야 책들을 폭넓게 읽고 나니 아이디어가 막 샘솟는다. 출판인들의 조언에 따르면 제목은 짧고 굵게, 직관적이지만 궁금함이 생기도록, 최대한 희망이 느껴지도록 지어야 한다. 그에 따라 제목을 눈에 확 게 수정하고, 미뤄 왔던 목차도 새로이 구성한다. 첫 에피소드부터 힘을 '팍! 팍! 팍!' 준다. 첫 문장을 읽으면 마지막 문장의 작은 동그라미까지 주욱 읽을 수 있도록 퇴고를 거듭한다. 중간에 한 번 튕겨져 나가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문장에 신경을 쓴다. 천재작가는 만들어진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퇴고에 유난히 집착한다. 어느덧 마지막이다. 투고 이메일 제목과 본문도 중요하다.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려는 편집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끔 야 한다.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게 시선을 확 사로잡는 내용으로 메일 본문을 채워야 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괜찮다. 위에 적힌 책들을 읽고 나면 답이  나온다.




천재작가는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제목을 짧고 임팩트 있게 바꾸고, 목차를 추가해서 미리 정리해 둔 50개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낸다. 원고의 특색이 분명하니 기획안은 계속 생략한다. 기획출판을 꿈꾸며 다시 원고를 투고한다.


"딩동! 3일 후 반가운 메일이 도착을 알린다."


아내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야 나 이번에는 정말 된 것 같아"라고 말하며 메일을 보여준다. 아내의 눈빛이 밝아진다. 출판사에서 보낸 '그린 라이트'가 확실하다. 그로부터 7시간 뒤 전화벨이 울린다. 메일을 보낸 바로 그 편집자다. 여섯 살 딸아이의 생일날 벌어진 일이다. 딸 대신 아빠가 특별한 선물을 받는다. 


"겸손이 미덕이다."


오랜만에 신이 난 허세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BB크림을 바른다. 함께 고생한 아내에게 "자기야, 가방 필요하지? 백화점 갈 준비 해!" 하고 당당히 말하고 싶지만 속으로만 삼킨다. 방긋방긋 웃으며 구두를 닦는 허세에게 미안하지만 다시 방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이제는 천재작가의 오만방자함이 모든 기력을 잃고 사라지고 없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고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속엣말)천재작가, 기획출판 가즈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겠지만 시간이 더 필요하다. 아쉬움은 위에 추천한 책들을 읽으며 달래길 바란다. 꼭 기억해라. 다독은 출간의 지름길이다. 천재작가는 곧 돌아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15. 천재작가, 두 번째 출간 제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