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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귀복 Jan 30. 2024

15. 천재작가, 두 번째 출간 제안

무명작가 에세이 출간기

원고 투고 하고 한 시간 만에 연락이 와서 계약까지 진행했어요.


브런치에 종종 등장하는 글이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일까? 원고를 다 읽지도 않고 헐레벌떡 연락부터 하는 부지런한(?) 출판인이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편집자가 투고 메일이 들어오자마자 확인하고, 내부 회의도 없이 곧바로 계약을 제안하는 게 실제로 가능한 일일까? 물론 천재작가는 답을 알고 있다. 정답은 4초 광고 후에 공개한다.


"천. 재. 작. 가."


가능하다. 천재작가도 이런 드라마 같은 사연의 주인공이 될 뻔했다. 원고 투고 당일, 이메일 발송 후 정확히 한 시간 만에 회신 메일을 받았다. 전체 원고를 읽기에는 대 불가능한 시간이다. 저자인 나도 못 읽는다. 당연히 '복붙' 거절 메일이라 예상한다. 눈 어두운 편집자를 욕하며 습관처럼 메일함을 연다. 어라? 그런데 평상시 받던 메일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본문이 글자로 빼곡하다. 눈 밝은 출판인이 도입부만 읽고도 대박이란 확신을 얻은 게 분명하다. 귀한 작가를 다른 곳에 뺏길까 두려워 서둘러 연락을 한 듯한 느낌이다. 직급을 보니 이해가 간다. 편집자가 아니라 총괄본부장이다. 역시 한 회사를 이끄는 리더다운 혜안이다.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희망'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옆에 바싹 붙어 앉는다.


"메일 본문의 스크롤이 아래로 길게 내려간다."


총괄본부장은 편집장을 통해 천재작가에 대한 예의와 존중, 원고에 대한 감탄을 긴 문장으로 표현한다. 5G 시대에 걸맞은 빠른 의사결정이 마음에 쏙 든다. 출판사 이름도 낯익다. 반복되는 거절로 축 처져 있던 입꼬리가 은근슬쩍 이수 지역을 이탈하더니 어느새 귀에 가서 자리를 잡는다. 눈치를 살피던 허세도 슬슬 거울을 보며 밖으로 나올 채비를 마친다.




"두근두근, '투고 당일 계약 성사'라는 기적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다."


정성스레 작성된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니 역시나 출간 제안이다. 온라인 서점에 접속해 출판사명을 입력하니 출간된 책의 목록이 한가득 나온다. 출판사 규모가 꽤 크다. 입이 쩍 벌어진다. 심지어 한 달에 수십 권을 발행하기도 한다. 귀가와 동시에 양말도 벗지 않고 아내에게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한다.


"자기야, 나 또 연락 왔어. 이번에는 진짜야. 사고 싶은 가방 있지? 빨리 옷 입고, 백화점 갈 준비 해!"


표정이 밝아진 아내가 "정말? 축하해. 출판사에서 계약하재?"라고 묻는다. 천재작가는 오랜만에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달라가며 아내에게 받은 메일을 보여 준다. 내용을 확인한 아내의 반응이 예상과는 다르게 시큰둥하다. 얼굴 표정도 안 좋다.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여자의 마음은 도통 알 수가 없다. 당신은 맞출 수 있을지 궁금하다. 긴 메일 내용의 일부를 공개하니 꼭 맞춰보길 바란다.


안녕하세요, 류00 작가님.
000북스입니다.

우선 저희 000북스에 원고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가님께서 정성으로 쓰신 원고는 소중히 검토해 보았습니다.

1. 메일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잘 읽히는 원고입니다. 작가님의 일상으로부터 나온 이야기와 사유들이 어우러져 편하면서도 웃음을 지어가며 읽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2. 과거시제가 아니라 현재시제로 진행되면서 속도감 있게 읽히는 것 또한 장점입니다.

3. 여기에 담담하지만 위트 있는 묘사와 서술이 곁들여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4. 제목 자체는 좋으나, 무난한 단어들의 나열이라 임팩트는 다소 약합니다. 부제나 카피로 부족하다면 제목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5. 원고 소개에 주신 '크고 작은 아픔과 상처들이 있는 일상이 따스한 행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드러내줄 부제, 카피 등을 통해 콘셉트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치유/힐링 계열 에세이는 시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개인의 에세이는 강렬한 감동이나 굉장한 재미와 정보가 담기지 않는다면 확실한 시장성을 얼마나 갖게 될지는 조금 불투명합니다. 이는 치유/힐링 분야 자체에서 오는 리스크이고, 이를 뚫어내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더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6. 사회적 울림이나 공감의 폭이 조금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세이라는 특성상 작가의 개인 경험을 담고 있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독자들이 읽고 공감하거나 어떠한 메시지를 쉽게 얻고 울림이 큰 글이 대중적 공감과 인기를 얻습니다. 현재 원고는 개인이 겪은 이야기와 사유를 담고 있는 데 그치는 면이 크고 그에 대한 공감이나 메시지적인 부분은 독자에게 맡기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출판사와 소통을 통해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완해 나간다면 이 원고의 시장성이나 경쟁력이 더욱 높아지겠습니다.

7. 문장 자체는 정돈되어 있는 편이나, 비문이나 오탈자, 문장 부호 등을 한번 더 점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래는 다듬으면 좋을 문장 사례들입니다.
ex)
.
.
.


출판사는 천재작가의 원고를 즉시 검토한 뒤, 지체 없이 회신까지 보내 다. 심지어 일부 문장은 수정까지 해서 첨부하며 적극적인 관심을 표한다. 다만 출간에는 조건이 있다. 무명작가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특별한 마케팅을 행해야 한다.




"출판사는 천재작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메일을 확인하는 중에 총괄본부장으로부터 문자도 받는다. '예약 판매 목표 달성'을 기본 전제로 하여 계약을 진행하자고 한다. 예약 판매 기간 중 300부에서 500부 정도를 구입해서 무명작가의 글을 초기에 '빵' 띄우려는 계획이다. 전문 용어(?)로 '인큐베이팅 기간'이라고 한다. "목표 판매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깔끔한 해결책이 눈에 들어온다. "남은 분량은 정가의 70퍼센트 가격으로 저자가 구입하면 된다"라고 한다. 혜택이 후하다. 책값을 무려 30퍼센트나 할인해 준다. 솔깃한 제안에 머릿속이 바삐 움직인다. 본인 150권, 본가 100권, 처가 50권으로 계산하니 300권이 딱 나온다. 직장 튼튼한 기혼 가장에게는 충분히 달성 가능한 미션이다. 의지가 막 샘솟는다. 500권을 목표로 하면 교정교열을 더 신경 써 준다고 하나 살짝 무리일 듯싶다. 아쉽긴 하지만 원고가 좋으니 300부짜리 기본 옵션으로 만족한다. 규모가 큰 출판사에서 출간 제안을 받으니 구름 위에 붕 뜬 기분이 든다.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나는 손오공의 심정을 느낀다. 그런데 함께 기뻐해 줄 것이라 예상했던 배우자의 반응이 이번에도 시큰둥하다.


"자기 돈 내고 만든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을까?"


아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다. 대형 출판사와 천재작가가 협업을 하는데 잘 안 될 수가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도 아까운 질문이다. "응, 당연히 되지"라고 답을 하니, 아내가 한숨을 푹 쉰다. 대화가 진전 없이 제자리를 계속 맴돈다. 결국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여동생에게 물어보기로 합의한다. 친동생의 반응이 궁금하긴 하다. 메일 내용을 캡처해서 카톡으로 보내니 금세 답이 온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오빠...."


기쁨(?)을 응축한 점이 네 개나 찍혀 있다. 자연스레 윤동주 시인이 쓴, '별 헤는 밤'의 운율이 떠오른다.


점 하나에 출간과

점 하나에 기쁨과

점 하나에 대박과

점 하나에 출간, 출간

오빠 드디어 작가가 되는구나.


이런 반응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와중에 예상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진다. "이거 오빠한테 장사하는 거 아니니?"라고 묻는다. 출판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오해가 분명하다. 심지어 카톡창을 뚫고 오빠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여동생의 경멸 어린 시선까지 보인다. 잊고 있었던 사실이 머리를 '쾅' 하고 때린다. 여동생도 성별이 여성이다. 알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빨리 출간을 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야 하는데 가까운 두 여성의 반대가 예상외로 심하다.




"출판사에서는 분명 자비출판이 아니라고 했다."


아내가 내게 "자기야, 제발 차분하게 생각해 봐"라고 말한다. 내 눈에만 제안이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다 상술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지혜의 여신답게 "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글이나 계속 수정해"라는 평소에 안 하던 제안까지 한다. 도무지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 순간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며 여섯 살 딸아이의 키즈노트가 작성되었음을 알린다.


오늘 원에서 오빠 이야기가 나왔어요.

모모(가명)가 우리 아빠도 오빠예요. 엄마한테 맨날 "오빠한테 말 만해 오빠가 다 사줄게, 하고 말하거든요"라고 말하며 웃던데요?

어머니 너무 좋으시겠어요~~♡


! 호기롭게 외치던 과거의 허언이 딸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까지 이미 쫙 퍼진 듯하다. 이쯤 되니 식욕을 잃고, 잠도 잘 안 온다. 이 병의 치료약은 출간 밖에 없다. 달 여만에 어렵게 처방을 받았는데, 처방전을 확인한 아내는 잘못된 처방이라며 복용하지 말라고 한다. 여섯 살 딸아이마저 "아빠 책 언제 나와?"라고 수시로 묻는다. 가슴이 답답하고, 모든 의욕이 사라지는 증상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진다.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어차피 내 글은 출간만 되면 베스트셀러에 오를 예정이다. 큰 결심을 하고, 아내에게 "나 그냥 계약할게"라고 말한다.


"자기 그렇게 책 내서 나중에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아내 입에서 나온 '정말'이라는 두 글자가 뾰족하다. 가슴을 콕콕 찌른다. 신중히 답을 해야 한다. 대형 출판사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예쁜 표지로 만들어진 책을 갖는데 후회할 이유가 있을까? 고민도 잠시, "응. 안 할 것 같아"라고 답을 한다. 참지 못한 아내가 준비해 둔 필살기를 꺼내든다. "그렇게 책 내고 어디 가서 당당히 작가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만족 못하고 다시 또 한다고 할걸? 그때는 소재가 없어서 지금처럼 잘 못 쓸 텐데 후회 안 하겠어?"라는 날카로운 팩트로 가슴을 계속 찌른다. 함께한 세월이 길다 보니 남편을 너무 잘 안다. 말로는 도저히 아내를 이길 수가 없다. 책 보다 가정이 우선이다. 천재작가는 결국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얼마 후, 다른 출판사로부터 기다리던 연락을 받는다."


내실이 튼튼한 출판사다. 다시 한번 아내와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출간 언급은 없지만 '그린라이트'가 확실하다. 천재작가에게 두 번의 실패는 없다. 최대한 겸손하게 답변을 적어 편집자에게 회신 메일을 보낸다. 7시간 후, 스마트폰이 우렁차게 울리며 때가 왔음을 알린다. 출판계약서에 서명을 남길 생각을 하니, 입꼬리가 또다시 이수 지역을 이탈하여 귀를 향해 달려간다. '흥얼흥얼'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대낮 키즈카페에서 어린아이처럼 아내에게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한다.


"자기야, 나 또 연락 왔어. 이번에는 진짜 같아. 이거 한 번 봐봐!"


천재작가는 여섯 살 딸아이의 생일날 운명을 바꾸는 연락을 받는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다음 주에 만나자.




# 작가의 말


"경험보다 큰 자산은 없다."


반기획출판으로 책을 내도 작가는 성장한다. 그러나 한계는 분명하다. 기성작가들이 반기획을 꺼리는 데는 이유가 다 있다. 기획출판은 어떨까? 편집자가 내 원고를 온정성을 다해 살펴보고 수정을 제안한다. 빨간색, 파란색으로 표시된 글자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맞춤법 오류는 기본이고, 안 좋은 습관들이 싹 다 드러난다. 민망함과 속상함, 때로는 억울함을 느끼지만 아쉬울 건 없다. 교정 과정을 거치면서 놀라운 성장을 이루기 때문이다. 천재작가는 이제 막 1차 교정을 마치고 이 글을 쓴다. 기분이 어떠냐고? 끝까지 믿고 말려준 아내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반기획출판 제안을 받거든 천재작가를 떠올려라."


타협하지 않고 퇴고를 거듭하다 보면 반기획출판 제안에서 '반'이란 글자가 빠지는 날은 ''드시 온다. 인생 생각보다 길다. 원고에 적힌 글자에 색이 입혀지는 특별한 경험을 당신도 꼭 해보길 바란다. 혹시라도 멘탈이 약해서 유혹을 이기기 어렵거든 언제든지 연락해라. 천재작가는 상시 답변을 준비하고 있. 매번 반복하는 그 말이다.


"고민할 시간 있어요? 그럼 빨리 퇴고하세요!"


오늘은 특별히 기분 좋은 제안을 하나 한다. 성실히 퇴고를 거듭하다 보면 출판계약서에 서명을 남기는 순간이 불현듯 찾아온다. 그날이 오면 댓글을 남겨라. 당신의 소중한 첫 책, 구매를 약속한다. 서점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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