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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씨네 Jan 07. 2023

< 더 글로리 > 직진하는 복수

* 본 글은 드라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은숙의 첫 장르 드라마

    학창시절 박연진(임지연)과 그녀의 패거리들로부터 모진 괴롭힘을 당했던 주인공 동은(송혜교)이 자신의 삶을 바친 복수의 계획을 하나하나 실행시키는 내용을 담은 <더 글로리>는, 각 에피소드 당 5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정주행을 해버렸다는 의견이 다분할 정도로 높은 몰입도를 선사한다. <더 글로리>의 작품 공개 예고에 당연하게도 ‘김은숙’ 이라는 이름 석자는 빠지지 않는다. 파리의 연인에서부터 태양의 후예, 미스터 선샤인까지 그녀의 작품이력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드라마들로 빼곡하다. 그런데 이번엔 김은숙 작가가 색다른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더 글로리>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녀가 집필해오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소재적으로도 멜로가 전방으로 나서지 않고, 복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리고 극의 전개는 한시도 관객들은 느슨하게 놔주질 않는다. 

    본 작품을 시청하기에 앞서 가장 염려했던 것은 바로 속도감이었다. 기존의 티비 매체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의 경우엔 광고 수익 및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해 분량이 길어지기도 하고, 이에 따라 불필요한 씬이 들어가기도 한다. 따라서 속도감이 죽을 수밖에 없는데, 기존의 멜로 장르에서 또는 티비 앞에서의 드라마 시청이라는 시청환경에서는 그러한 더딘 속도감이 다소 용인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이 복수 드라마에 삽입되었을 때 그 재미가 유지되는가라고 한다면 이는 다소 불투명하다. 더욱이 그동안 긴 회차의 포맷 안에서, 장면장면 안에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티키타카로 주로 극을 이끌어가던 김은숙 표 드라마에서 이런 복수 드라마의 속도감이 얼마나 잘 표현될 수 있을지 물음표가 찍히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더 글로리>는 마침 이 부분을 최우선 과제로 해결했다는 듯, 이런 기대에 걸맞게 잔가지들이 정리된 상태로 진행되었다. 50여분의 러닝타임은 온전히 동은과 연진의 과거, 그리고 동은이 계획한 복수의 패를 하나하나 보여주는데 공을 들인다. 첫 장르물에 도전하는 김은숙 작가의 놀라운 재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본 작품의 우직함은 연출자 안길호 감독의 몫이기도 하다. <비밀의 숲>과 <왓쳐> 등 묵직한 드라마의 성공적인 연출을 이끌어낸 안길호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그 능력을 펼쳤다. 김은숙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동은과 여정(이도현)이 나오는 장면을 쓸 때면 계속 로맨스를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이럴 때 안길호 감독이 다시 본론으로 끌고 오는 역할을 해내지 않았을까 살며시 짐작해 본다. 하지만 동은과 여정의 장면을 보고 있자면 김은숙 작가의 말대로 본인의 특기가 뿜어져 나오려고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나 이는 작가 본인의 필체 정도로 남겨두자. 사실 김은숙 작가의 장점으로 뽑히는 그녀의 문학적인 대사들은 때로는 날개가 되어주기도 했다. '신이 널 도우면 형벌, 신이 날 도우면 천벌.'과 같은 대사들은 안길호의 연출에 힘입어 더욱 동은의 복수에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다층적인 빌런들

    본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데에는 박연진을 필두로 한 빌런들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매력적인 빌런이 존재할수록 이를 극복해나가는 주인공의 여정이 더욱 궁금하고 응원하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허나 본 작품의 스토리가 더욱 탄탄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빌런들이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준, 사라, 혜정, 명오로 이뤄져 있는 연진의 무리가 단순히 연진으로 대표되는 동질적인 일진 무리로 묘사되었다면 동은이 연진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비교적 단순하게 느껴졌을 수 있다. 허나 명오와 혜정이 다른 아이들과 계층의 차이로 인해 멸시를 받는 설정을 부여해주면서 그들 내부에서도 갈등을 야기하면서 각자의 틈을 차츰 벌려나가 준다. 이로 인해 동은의 서사를 제외하고도 연진 무리들 내부의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보는 맛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동은은 명오를 이용하고 혜정을 이용하며 연진에게 향한 복수를 차근차근 실행해 나간다. 동은이 연진 무리의 약점을 하나씩 잡아 이를 이용하는 것이 공개된 에피소드들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명오와 혜정을 통해서 나머지의 약점을 캐내고 복수의 패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통쾌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한편 동은을 돕는 조력자들은 빌런들의 설정에 비해 비교적 아쉬움이 남았다. 병원장의 아들인 여정은 동은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상처들을 보고선 스스로 칼춤을 추기를 자처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어느 정도 그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깊이는 짐작할 수 있으나, 만나본 건 몇 번뿐인 동은을 위해 동은이 일하는 세명시에 개인병원을 개원하고, 그녀를 위해서 직접 칼을 들고 복수를 돕겠다고 하기엔 여정의 감정적인 토대가 튼튼하게 쌓이지 않았던 것 같다. 여정에 비해 현남의 캐릭터는 이유는 분명했다. 남편의 무지막지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동은과 일종의 거래를 한 현남은 동은의 일을 돕는 일을 자처하는 대신 남편을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동은과 접선을 할 때마다 현남은 푼수끼 가득한 웃음과 코믹한 상황을 연출하는데,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그를 죽이려고 계획을 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게감이 떨어져 보였다. 극 전체적으로 무감정한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동은의 캐릭터에게 일말의 미소를 지어주며 인간적인 모습을 비춰주기 위한 설정으로도 보이나, 전체적인 톤과는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Part 2를 기다리며

    복수극은 시청자들에게 큰 쾌감을 안겨준다. 때때로 작품 속 주인공처럼 행하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 주인공처럼 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이 이를 대신 행하여 줄 때, 시청자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서 복수 이야기는 사이다라는 수식어와 함께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다. 동은의 복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제 복수의 틀을 다듬었을 뿐이다. 3월에 공개될 파트 2에서 연진을 향한 복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주변인물들의 사정으로, 내면적인 동요로 인해 복수의 칼날이 무뎌지는 복수극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글로리>는 지금까지 복수라는 키워드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것처럼 그 끝을 깔끔하게 장식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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