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무인도 탈출기>를 보고 나서
무인도 탈출기
범상치 않은 제목과 달리 <무인도 탈출기>는 2021년 어느 지하방에 정말로 살고 있을법한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다. 보면서 이게 정말 크게 와닿길래 왤까 생각해봤는데, 지금까지 본 50개가 넘는 극 중 허구적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 극은 반의 반도 안되고, 인외존재가 나오지 않는 극은 반의 반의 반도 안되고,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극은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더라. 그런 면에서 이 극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시간동안 살면서 가보지 못할 세계, 만나보지 못할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는것도 충분히 재밌고 좋아하지만, <무인도 탈출기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실존 인물들의 삶과 생각을 보는 기분이라 더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극중극 속 봉수는 원하던대로 취직을 하고 집도 사고 차도 샀지만, 해외 출장을 가던 중 사고로 무인도에 홀로 표류하게 된다. 처음엔 두려움을 느끼던 봉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홀가분함을 느끼게 되고... 현실 속에선 잊고 살던 어린 시절의 꿈을 무인도에서 자유롭게 꾸기 시작한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 있는데, 사람이 언제나 하고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건 알지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나인데 왜 그러지 못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앞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있으니까, 무인도에 홀로 남겨지지 않는 이상 마음대로 회사를 때려칠 수도 없고, 하루종일 만화만 읽거나 만화가의 꿈을 새롭게 꿀 수도 없다.
물론 극이 이렇게까지 현실에서의 가능성을 꽉꽉 막아둔건 아니지만... 현실이 그렇잖아. 일하기 싫다고 당장 회사를 때려쳐도 되는게 아니고, 꿈을 찾겠다고 모든걸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고. 매순간 현실과 타협하며 할일을 해내야만 도피할 수 있고,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시 현실로 돌아와야만 하고. 그래서 무인도를 나오기 싫다고 말하는 봉수가 꼭 내 모습 같았다. 밖으로 나오면 또다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해야 하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런 의무도 제약도 없는 무인도에 있는게 편하고 즐겁지 않을까. 요 근래 진심 70 장난 30정도의 마음으로 누가 나좀 어디 가둬줬으면 좋겠다 말하고 다녔었는데, 어쩌면 나도 표류할 수 있는 무인도를 계속 찾아 헤맸는지도 모르겠다. 봉수는 동현이의 이야기를 직접 연기하기라도 했지, 나는 그 모습을 한발짝 바깥에서 보고만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그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올수가 없었다. 세 인물 중 가장 현실감없는 인물처럼 그려졌던 동현이가 "이건 이야기일 뿐이야" 말해줌으로써 극도 나도 무인도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수아는 봉수와는 정 반대의 인물로 그려진다. 봉수가 무인도 속에서 잊고 살던 꿈을 찾고,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면, 수아는 무인도 안에서 지금껏 꿈 없이 살아왔음을 마주하고, 꿈을 찾기 위해 무인도 밖으로 나가려 한다. 많은 이야기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꿈, 누가 봐도 멋진 꿈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고 있고, 나도 지금껏 그 모습을 보며 감동받아 왔지만, 마음에 더 와닿았던 건 수아의 이야기였다. 꼭 모두가 반짝이는 꿈을 가져야 할까. 대단한걸 꿈꾸며 살아야 할까. 그냥 하루하루 소소한 즐거움을 쫓으며 사는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나에게도 내세울만한 빛나고 뚜렷한 꿈이 없어서 그런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수아가 '정리'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지금까지 해본것 중 가장 재밌었던 일인 연극에 다시 도전해보자고 말하는 것이 좋았다. 후반부에 수아가 벼랑 위에서 독백하고, 별을 바라보며 꿈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가장 많이 울었던것 같다. 더 공감되는 인물은 봉수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명과 감정이 너무 좋아서...
극중극이 끝나고, 무인도에서 탈출한 인물들의 현실은 이전과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동현이는 실업급여가 끝난 백수 상태, 봉수는 서류에서 계속 떨어지는 취준생, 수아는 편의점 알바생. 그럼에도 연극 공모전에 또다시 도전하는 그들의 모습이 현실로부터의 소소한 탈출처럼 느껴졌다. 그래 현실이 힘들면 무인도에 잠깐 다녀오고, 또 다른 무인도로 옮겨가면 되지. 그래도 무인도가 인물들에게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하나의 작은 성장 포인트처럼 보여서... 연극이 끝난 후엔 또 한발짝 나아가 있겠지. 어떻게 보면 <무인도 탈출기> 자체가 나의 도피처이자 무인도인데, 그 극 안에서 "이건 이야기일 뿐이야" 말하는게 슬프게 느껴졌다. 날 내쫓지 마... 난 나가기 싫단말이야... 하지만 내일의 현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으니... 오늘은 자야지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