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하나 더 큰 그릇이 없다.
아진은 한참을 그렇게 방에 머물렀다.
조카들이 왔다갔다하고, 아진의 시부도 손녀들과 놀아주기위해 함께 방에 있었다.
손녀들과 놀아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편치않은 마음으로 카메라에 담으며 이 방안에서 섞여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지만 아진 스스로 공기가 너무 다름을 느꼈다.
그 시끄러운 방 안에서도 누군가가 설거지를 하는 소리는 너무도 귀에 박혀들어왔다.
아진은 견디기 어려웠다. 눈치도 보였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달하였고, 아진은 니트 소매를 걷으며 옆에 가 섰다.
애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말투로,
"제가 헹굴게요."
그러자 대번에 쌀쌀맞게 돌아오는 말,
"지금 안 하면 좋겠는데."
"네?"
"그냥 내가 혼자 할게."
어이가 없음을 느낀 아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그러세요도 아니고 그래요라니. 아무리 당황했어도 존대는 했어야하는데.
이 날의 이 장면을 아진은 오랫동안 기억하게된다.
보통날이었다면 늘 설거지하는 인원은 결국 두 사람이다.
한 명이 비눗칠을 하면 한 명이 뒤이어 합류해 헹굼질을 한다. 한번도 깨진 적이 없는 협동규칙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규칙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진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같은 마음이구나, 다행이다.' 싶었다.
아진은 오늘 이 공간에 있는 게 너무 견디기 어려웠다. 평소와 달리 어서 나서자고 남편을 채근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차에 탄 아진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아진이 운 이유는 답답해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상황이 매우 찝찝했지만 지금은 해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화가 나고 열이 받았다. 남편에게 온갖 짜증을 있는대로 내며 울기만했다.
미련하기도 했지만 아진은 울고싶을 땐 그냥 냅다 울어버리는 편이라 펑펑 울며 자위중이었다.
그렇게 그명절을 보냈다.
명절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 아진의 손가락은 긴 메시지를 쓰지 않아도 됐다. 처음이었다.
아진은 몇날며칠을 고민했다.
이렇게 지내는 건 시부모께 잘못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속내는 아진이 새식구가 된 이후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아진의 탓이 될까 겁이 났다.
달하의 동네로 찾아가 대화를 시도해볼까 싶다가도 여태 듣고 봐온 그녀라면 별생각없이 한 행동에 아진이 예민하게 받아들여 오버한 것으로 얘기가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곳에 찾아간 스스로의 발등을 찍어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보자, 말할까말까 할 때는 말자랬다, 그래보자, 싶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고민해도 실수라고 생각되는 것이 없었다.
사실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진과 달하가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진 것이 지난 명절이었고, 그 때는 달하가 아진에게 다정하게 진심을 담아 "놀러와~~^^"라고 건네며 헤어졌으며, 그 이후로는 만날 일도 마주칠 일도 연락을 주고받은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놀러오랬는데 아진이 안 가서일까? 정말 겨우 하나를 찾으라면 그것뿐이다.
아진도 모르게 작은 말실수라도 할 기회조차 없었다. 아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진의 남편과 아주버니는 상당히 우애가 좋다.
서로 꽤 멀지 않은 곳에 살고있다보니 시간이 될 때 주말에 둘이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명절이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 둘이 여느때처럼 만났는데 아주버니가 인사로 말을 꺼냈다.
"제수씨는 그날 컨디션이 별로 안좋았었나봐?"
"그래? 오히려 형수 컨디션이 안좋았던 것 같은데? 아진이 인사를 안받아줬다는 것 같어."
"어? 그래? 왜 그랬지?"
남자 둘도 분명 익히 들어 알고는 있겠으나 거기까지였다.
현명한 남자 둘은 그렇게 입을 닫았다.고 한다.
아주버니의 뉘앙스로 보아도 아진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므로 달하가 아진에게 갑자기 찬바람이 부는 이유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결론냈다.
그리고 몇 주 후,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시부의 생신모임이 있었다.
모임장소는 아진의 동네로 정해졌고, 아진은 케이크와 시부모께 드릴 담백한 빵 몇가지를 샀다.
평소라면 조카들이 좋아할 빵을 먼저 골랐을 아진이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괜히 달하에게 먼저 손내미는 것 같아 싫었고, 인사 주고받을 꺼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카들을 두고 생각하니 치사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냥 그러기 싫었다.
도착하니 이미 다들 먼저 와있었고, 아진은 들어가며 모두를 향해 인사를 한 번 하고는 말았다.
그것부터가 달랐을까.
사실 아진의 마음부터가 이미 많이 달라져있었다. 지쳤다고나 할까. 홀가분하다고나 할까.
더 애쓰지 않아도 되니, 그리고 그 명분은 달하가 제공해줬으니 차라리 잘됐다싶었다.
큰조카가 워낙 아진을 좋아해 아진의 옆에 앉겠다는 고집을 부려 어쩌다보니 시아주버니와 아진이 나란히, 달하와 아진의 남편이 나란히 앉게되는 희한한 자리배치가 이루어졌고, 아진과 달하는 같은 식탁에서 마주보게 되었다.
아진의 입장에서는 말 한 마디, 눈빛 한 번이 오가질 않는 고요한 식탁이었다.
그러던 중 아진이 젓가락을 내려놓다 실수로 술잔을 엎어 술이 엎질러졌다.
아진은 놀랐지만 '앗!'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술잔이 넘어지는 소리에 모두가 알았겠고, 냅킨 가까이에 있던 달하가 얼른 냅킨을 내밀었다. 물론 아무런 입소리 없이 말이다. 아진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냅킨을 한 손으로 받아 슬슬 닦았다. 당황하지 않았다는 듯이, 괜찮다는 듯이. 그리고 그 광경을 모두가 지켜보고있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까지 아진과 달하는 그렇게 서로 못 본 체 했다.
며칠 후, 아진의 시모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
"얘야, 너랑 달하 무슨 일 있었니?"
아진은 '올 것이 왔구나.' 했다.
분명 달하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셨을거라 생각했다.
"아, 제가 조금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었어요."로 시작했지만 다 말씀드리진 못했다.
왠지 고자질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머뭇머뭇하며 그냥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만 말씀을 드렸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아랫사람인데~네가 더 싹싹하잖니. 네가 이해하고 숙이고 넘어가거라."
이해까진 괜찮았다. 넘겨라도 괜찮았다. 그런데 숙여라에서 정신이 바짝 들었다.
"어머님, 죄송한데 싫습니다. 저한테 이런 말씀 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더는 형님한테 잘하려고 애쓰지 않을거고요. 어머님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사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이었다. 아진이 시모에게 이런 시한폭탄을 남긴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런 말을 듣고 할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나 그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아진은 시부모의 마음 편하게 하자고 자신의 감정을 속이긴 싫었다. 아진이 근무하는 조직 내에서나 볼 수 있는 아진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아진은 되바라지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대로 했다.
그런 아진을 시모는 집으로 불렀다. 아진은 남편과 함께 시가에 갔고, 시부모가 권하는 술에 취기가 올라 속내를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시부의 말씀이 이랬다.
"그래서, 지금 네 편 들어달라는거냐?"
대앵-.
취기가 싹 달아났다. 아! 여기 우리집 아니지, 여기 남편 부모님의 댁이지. 정신차리자!
그 이후로 아진은 그날 일을 포함해 달하와 연관된 것은 어떤 것이든 한 음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시부모는 아진이 달하에게 숙이길 바랐고 아진은 죄송하지만 그러고싶지 않다고 했다.
시부모는 동서 간의 갈등이 형제에게까지 치닫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워낙 우애가 좋고 현명한 형제이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모두들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로 다음 명절을 앞두고 있었다.
차례 전날 역시도 시모는 아진에게 전화를 걸어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아진 역시 쉽게 지지 않았다.
"그럼 어쩌겠다는거냐, 응? 너네 둘이 그러는 걸 시부모까지 다 알게 해놓고, 이러다 형제 우애에 금이라도 가면 어쩌게, 너 행여라도 남편한테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다!"
아진은 또 회사원 모드를 발동시켰다.
"그럼 전 누구한테 말할까요? 제 본가에 말할까요? 남편과 결혼하면서 만난 식구때문에 힘든 점을 남편 아니면 누구한테 얘기하나요?"
어쩌다보니 아진도 목소리가 커졌고, 이를 듣던 아진의 남편도 아진에게 놀라면서도 서운해했다. 자신의 부모에게 그렇게까지 말했어야하냐는 류의 서운함이었다. 개의치않았다.
목소리를 높인 것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기때문에 사과를 드릴 생각은 없었다.
아진은 남편과 시모의 서운함을 해결해주지 못한 채로 시가에 갔다.
다음 날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모두 한 곳에 모였다.
불편한 마음에 다들 잠못이뤘는지 퀭한 얼굴들로 여유있게 도착한 덕에 차례상을 차리기 전 시간이 있었다.
아진은 멀찍이 주방 한 켠에 앉아있었고, 달하와 아주버니 그리고 아진의 남편은 작은 교자상에 앉아 부동산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런데 시모가 베란다에서 소쿠리와 대파 몇 단을 들고 나와 달하 옆을 지나가더니 달하를 툭 쳤다. 시모는 그 길로 현관으로 나갔고 잠시 뒤 달하가 치마를 들썩이며 일어나더니 현관으로 나갔다.
아진은 '곧 옥상에 올라갈 일이 있겠구나.' 했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모가 다시 들어왔고 아진을 향해 말했다.
"야, 너 올라오래."
"네? 네."
'아, 이게 다 어머님의 작전이구나. 어떻게든 둘을 대화하게 만드시려는. 그래, 이참에 물어나보자.' 하고 아진은 올라갔다.
올라가니 달하는 등을 보인 채로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하가 고개를 돌릴 때까지 기다릴까하다 괜히 이런 걸로 힘빼지 말자 싶어 부러 기척을 냈다.
"저 부르셨어요?"
형님이라는 호칭은 뺀 채로 말이다.
"동서 뭐 나한테 서운한 거 있어?"
"저야말로 여쭤보고 싶었던 건데요. 혹시 제가 뭐 실수한 게 있었나요?"
"아니, 뭐 오빠(아진의 아주버니) 말로는 내가 인사를 안받아줬다고 하던데 난 평소랑 똑같았는데 뭐가 문제였어?"
달하의 말을 들은 아진은 그 일 이후 달하를 찾아갈까 하다 말았던 자신을 토닥여주었다.
예상했던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때 아진이 달하를 찾아갔다면 일이 이 지경까진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아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설거지할 때는 왜 그렇게 쌀쌀맞았던거냐, 내가 요령피워서 화나셨던거냐 등 묻고싶기도 했지만 말았다. 듣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아진은 달하가 갑자기 아무런 이유없이 자신을 그렇게 대했다는 것에 대해 안도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달하에게 아진은 그냥 그렇게 대해도 될 만큼의 존재였던거라고.
'이젠 편해져도 되겠구나.'
아진은 이 관계에 대한 상념을 내려놓기로 했다.
잠시 잠깐이었지만 '오해해서 죄송했다.'라고 사과할 마음을 먹었던 자신이 안쓰러웠다.
아진도 온전히 시모의 작전으로 올라온 것이지만 달하도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둘이 그릇의 크기가 같으니 이렇게밖에 해결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던 중 달하가 마무리멘트를 꺼냈다.
"앞으로 서운한 일 있으면 서로 얘기하자."
"네, 형님. 이렇게 불러서 얘기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내려가자."
옥상에서 내려온 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명절 아침을 보내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운 아진은 달하에게 가 팔을 내밀었다.
"형님, 이것 좀 걷어주세요오."
전과는 달리 애교는 없었지만 상냥한 어조의 부탁이었다.
달하 역시 전처럼 웃진 않았지만 다정하게 아진의 소매를 접어 올려주었다.
아진과 달하는 함께 설거지를 했지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아진은 하루 아침에 하하호호 웃을 수는 없겠다 생각했고, 달하 역시 그렇게 여길거라 짐작했다.
아진이 비눗칠을 다 끝낸 후 달하에게 말했다.
"형님, 이제부터는 제가 헹굴게요."
"그래, 혼자 하는 게 편하지?"
"아뇨아뇨, 그런 건 아니구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제가 헹구고 물기 닦아서 정리할게요. 쉬셔요."
어차피 쉬지않을 달하인 걸 알지만 그렇게 말했고, 달하도 그럼 부탁한다며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둘의 등이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차례를 지내고 집에 돌아가는 아진의 차 안.
"아까 둘이 옥상에서 무슨 얘기했어?"
"이래이래이래이랬어."
"그럼 잘 풀린거야?"
"글쎄, 형님도 나도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한 거다 보니까 둘 다 형식적이었어. 그래도 푼 건 푼거겠지?
근데 나 전처럼 애쓰진 않을거야. 그냥 이 정도로 웃으면서 만나고 웃으면서 헤어지는 게 딱 좋은 것 같네. 이제 전처럼은 하래도 못 할 것 같아. 안할래. 이게 편한 걸 알아버렸어ㅎㅎ."
그렇게 아진과 달하의 일은 일단락 되는 듯 했다.
끝에 도돌이표가 있었을 줄은 이 때는 몰랐으니까.